존 템플턴의 '100년을 내다보는 나눔' <하>
전쟁 영웅에게는 무용담이 있고 부자에게는 돈 버는 이야기가 있다. 월가에서 여전히 존경받는 고 존 템플턴 경이라면 어떨까.
그에게서 돈을 버는 방법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쓰지 않는 이야기다. 돈을 버는 것도 더 큰 부를 축적하려는 게 아니라 더 값지게 쓰기 위해서였다. 미국 테네시주 시골에서 세계 금융의 중심이라는 뉴욕 월스트리트에 진출한 템플턴은 스스로 휴양지 바하마를 제2의 고향으로 낙점했다. 그만의 비밀은 무엇일까.
◇묵묵히 걷다=템플턴이 10대일 때 그와 가족들은 미 북동부와 서부지역을 여행했다. 하루에 수백 마일을 달리며 야영을 했고 직접 음식을 만들어 먹었다. 따뜻한 호텔방은 꿈도 꿀 수 없었지만 역사유적, 국립공원, 기념관, 박물관, 오대호, 태평양까지 모든 것을 봤다.

템플턴은 어른이 된 뒤 중·고교생이었던 자녀들과 직접 버스를 운전하며 유럽여행을 했다. 아이들에게 예산을 짜도록 했고 지출도 맡겼다. 돈을 남기면 그들의 용돈으로 쓰도록 했다. 템플턴 가족은 여행을 마치고 버스를 팔아 100달러를 남겼고 여행기를 잡지에 기고해 1500달러를 벌었다.
옥스퍼드대 유학시절 그는 친구와 함께 7개월에 걸쳐 35개국 여행을 떠났다. 딱딱한 빵을 먹으며 싸구려 호텔에서 자고 3등 기차칸과 여객선을 이용했다. 세계일주는 미국 외 여러 국가에 대한 투자에서 그가 거둔 성공의 자양분이 됐다.
◇'돈 안쓰기'=템플턴의 검약은 돈을 버는 방법이기도 했다. 그는 12세 때 창고에서 멈춘 자동차를 10달러에 샀고 부품 교체를 위해 또다른 구식 자동차를 10달러에 구입했다. 그는 자동차 정비책을 파고들고 정비공에게 한 수씩 배워가며 차를 재조립했다. 그 차는 4년을 더 움직였다. 템플턴은 이후 중고 자동차만 고집했고 그가 200달러 넘는 승용차를 갖게 된 것은 재산이 25만달러를 넘어선 뒤였다.
템플턴은 회사를 운영할 때도 이른바 타자기(타이프라이터) 원칙을 제시했다. 사무실 집기를 들여놓을 때 그는 가급적 중고품을 사기를 원했고 대표적인 것이 타자기였다. 컴퓨터가 없던 시절에 사무를 위해 타자기는 필수였지만 새 것을 사자마자 가격이 30~40% 떨어지는 게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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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직원들은 사용한 지 몇 개월 안된 중고 타자기를 신제품의 절반 정도 가격에 사들였고, 이런 검약에 힘입어 회사는 설립 2년 만에 흑자로 돌아선 후 매년 이익을 냈다.
◇공포와 시련은 지렛대=그의 본격적인 돈벌기는 1939년에 시작됐다. 당시는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며 2차대전의 전운이 감돌던 때였다. 그는 전시에는 생산성이 가장 떨어지는 기업조차 회생할 수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고 과감한 투자에 나섰다.
뉴욕 증권거래소에 상장된 주식 가운데 1달러 미만에 거래되는 모든 종목을 100달러어치씩 매수한 것이다. 지인에게서 1만달러를 빌리는 모험도 감행했다. 그가 매수를 결정한 104개 종목 중 37개는 이미 부도상태라는 충고도 있었지만 그는 거침이 없었다. 그는 미국이 참전하지 않아도 전시물자를 공급하게 될 것이라는 점도 간파하고 있었다.
그뒤 전쟁이 일어났고 템플턴이 선택한 헐값 주식들은 4년 정도 보유한 뒤 팔 때 4만달러가 넘어 있었다. 돈을 벌고 빚까지 청산하게 된 그는 회사를 차렸고 외형도 확장했다.
잘나가는 투자자문사 사장이었지만 그는 1950년대 초 큰 시련을 맞는다. 어머니가 타계하고, 부인도 사고로 잃은 것이다. 그는 개인적인 비극을 열정적인 투자활동으로 잊으려 애썼고 대외활동도 늘려나갔다. 프린스턴신학대 재단이사회 일을 맡고 젊은 사장들의 모임(YPO)에도 참여한 게 대표적이다. 이 모임의 초창기 회원자격은 40세 미만으로 연매출 300만달러 이상 또는 종업원 100명 이상인 기업의 사장이었다. 그가 일궈낸 템플턴그로스펀드가 출범한 것도 1954년이었다.
최선보다는 최악을 따지는 것이 템플턴의 또다른 투자원칙이었다. 주식투자자들은 대개 주가가 기업가치보다 형편없이 쌀 때 사려고 하지만 이는 다른 사람들이 모두 파는 경우에 발생한다는 게 템플턴의 판단이었다.
대세를 거스르는 것은 그에게도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그가 68년 바하마군도로 집을 옮긴 것도 이런 고민의 반영이다. "월가에서 1000㎞ 떨어진 다른 나라에 있다면 자신의 판단에 따라 다른 사람들이 파는 종목을 사고 다른 사람들이 사는 종목을 파는 일이 훨씬 쉬워질 것이다. 바하마에서는 최고로 싼 주식을 찾는데 더 많은 시간을 쓸 수 있다."
◇10분 빠른 그의 시계=그는 자투리시간을 활용하는 데도 앞서 있었다. 비행기와 버스를 타면서 보내는 시간, 약속한 사람을 만나기에 앞서 기다리는 시간에 기업리포트를 읽고 그래프를 분석하고 다양한 정보를 섭렵했다.
시간을 정확히 지키기 위해 그는 늘 시계를 10분 빠르게 맞춰놓았다. 그가 몇시 몇분에 전화를 한다고 말을 했으면 정확히 그 시간에 전화벨이 울렸고 세계 각지를 여행할 때도 이 원칙은 어김없이 지켜졌다.
시간과 관련해 그에게는 5대5의 원칙도 있다. 교회에 가거나 자선활동을 위해 절반의 시간을 쓰고 가족들의 투자자산과 뮤추얼펀드 운용을 관리하는데 나머지 시간을 쓰는 것이다. 60년대 중반부터 그는 이 원칙을 고수했고 평생 이를 실천했다.
◇사람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그는 지인이나 파트너와 관계를 소중히 여겼다. 그는 60여년간 여러 회사를 운영하면서 자신은 물론이고 회사 어느 곳도 소송을 걸거나 소송을 당하지 않았다.
또 존 갤브레이드 등 사업파트너의 헌신을 이끌어낸 것도 그의 성공에 일조했다. 74년 합류한 갤브레이드는 4년 만에 펀드자산 총액을 1억달러로 불려놨고 92년 매각 당시 자산총액은 220억달러에 달했다. 74년 이전까지 템플턴의 펀드는 성과는 뛰어났지만 자산총액은 700만달러에서 1300만달러로 늘어나는데 그쳤다.
갤브레이드는 10년내 펀드자산을 10배 이상 늘리겠다고 제안했고 4년 만에 8배 가까이 불리며 이를 성사시켰다. 78년 템플턴월드펀드를 비롯해 소형주와 해외 유망기업에 투자하는 펀드들이 연이어 출범한 데는 템플턴과 갤브레이드의 의기투합이 자리했다.
템플턴은 지난해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활동과 철학은 템플턴재단을 통해 이어지고 있다. 그는 타계 전 10여년간 매일 기도를 올리며 하루를 시작했다고 한다.
"당신의 무한한 사랑과 지혜를 얻을 수 있도록 제 마음과 가슴을 더 활짝 열 수 있게 도와주시고 당신의 사랑과 지혜를 이 땅의 오늘을 살아가는 당신의 다른 자식들에게 비춰줄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기도는 템플턴의 삶을 통해 현실화됐고 템플턴재단은 그의 기도를 세상에 옮겨놓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