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깃발을 든 사람을 '시작'으로...

세찬 빗줄기 위로 깃발을 올립니다, 전하. 소신은 말갈의 피를 받아 검은 지평선을 홀로 걸어온 사람, 전하의 목을 칠 역적입니다. 생전 처음 보는 번개가 궁궐을 때리고 피뢰침 속으로 사라질 때 소신은 올 것이옵니다. 곧이어 새와 구름이 지나간 곳, 나비가 얇은 날개로 허공을 저며 낸 화사한 길을 끊는 번개가 칠 것입니다. 전하, 소신의 붉은 머리카락이 빗줄기 속에서 망나니처럼 펄럭이고 차가운 비명소리가 들리거든 귀를 여시고 무릎을 꿇어야합니다. 전하, 역적의 시간이 전하의 은총으로 왔지만 익숙히 멈출 수 없어 지독한 고독 이후에 혼란한 역적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옵니다. 눈부신 어둠의 기둥 위로 쏟아지는 빗발을 따라 오는 새벽, 젖은 깃발이 마르기도 전에, 세계를 받치던 전하의 무릎은 부서지고 역적의 나라는 완성될 것입니다. 그 때 피 묻은 칼을 들고 날선 지평선을 마저 넘겠습니다. 전하, 소신은 말갈의 후예, 완성된 역적의 나라에서도 지평선 너머 지평선으로 가는 행려자입니다. 시작은 언제나 시작이오니 전하, 그럼 하해 같은 은혜 소신의 어미에게 그러하였듯이 전하의 목을 치겠습니다.
'시작'은 특별한 한 순간이 아니다. 모든 순간이 다 새로운 출발이고 '시작'이다. 극단적으로는 1초 전의 '나'와 1초 뒤의 '나'도 분명히 다르다. 그 짧은 순간에 마신 공기, 들은 이야기, 본 것들이 나에게 새롭게 축적되어 다른 나를 만들기 때문이다.
'나'는 늘 새로운 시작이다. '시작'은 마음 다잡고 맞이해야할 무엇이 아니라 일상의 시간들 속에서 성실히 수행해야 할, 때로는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수행되고 있는, 어떤 것이다. 무엇을 이루었다고 하는 순간에도 우리는 어느 끝에 이른 것이 아니라, 이미 또 다른 '시작'에 서 있을 뿐이다.
시작을 방해하는 기존의 안일한 안녕과 관성적 질서의 목을 과감하게 내리칠 때 우리는 우리 삶을 매순간 새롭게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전혀 다른 시간들이 우리들 앞에 무한히 닥쳐오고 있다. 시대의 지평선을 넘어 우리의 삶은 언제나 새롭게 시작된다.

김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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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문인화가([email protected])
약력: 시집 '그리움의 넓이', '도화동 사십계단', '꽃이 너를 지운다', '그대가 정말 이별을 원한다면 이토록 오래 수화기를 붙들고 울 리가 없다', '나쁜 사랑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