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두눈을 잃었지만 선왕은 머리를 잃었다" 권력앞에 당당함이란?

"나는 두눈을 잃었지만 선왕은 머리를 잃었다" 권력앞에 당당함이란?

김고금평 기자
2015.01.10 05:53

[BOOK] '나의 서양사 편력 1, 2'…서양사 99장면 통해 '나를 깨우는' 작업 조명

청교도 혁명을 통해 왕정폐지를 주장한 영국의 시인 존 밀턴은 17세기 혁명 기간 찰스 1세의 처형에 적극 동참했다. 처형은 성공했으나, 혁명은 실패로 끝났다. 왕정이 복고되자, 찰스 2세는 밀턴을 반역자로 몰았다.

그 당시 밀턴은 녹내장으로 실명했고 가진 것 없는 장애인 신세로 아내와 세 딸을 부양해야했다. 왕정은 이 곤궁의 처지를 이용했다. 요크 공 제임스(찰스 2세 동생)가 밀턴을 찾아가 빈정거리듯 물었다.

“당신의 실명이 혁명 활동에 대한 ‘신의 심판’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밀턴은 답했다. “그렇다면 부친이신 선왕에 대해선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하늘은 저보다 부친께 더 불쾌하셨던 게지요. 저는 두 눈을 잃었을 뿐이지만 선왕은 머리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밀턴은 가장 암울한 상황에서도 권력 앞에 당당했다. 사욕을 위해 기꺼이 양심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있는 천격(賤格)의 엘리트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이미 지나간 400년 전의 이야기. 우리가 묻고 잊어야할 고전일까, 깨우치고 되새겨야할 교훈일까.

저자 박상익(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는 ‘나의 서양사 편력 1,2’에서 서양사 99장면을 그리며 ‘나를 깨우자’고 종용한다. 중요한 서양사 편력 중 저자는 특히 ‘밀턴의 이야기’에 5장면을 할애했다.

16세기 종교개혁의 지도자 칼뱅이 주장한 종교 자유에 대한 초기 ‘의도’는 받아들이되, 개혁이 또다른 권력을 낳은 칼뱅의 ‘독재’는 수용할 수 없다며 끝없는 종교개혁을 외친 이도 밀턴이었다. ‘언론의 암흑시대’로 간주되는 이명박 정부 5년에 대한 성찰은 국가의 검열제를 비판한 밀턴의 ‘아레오파기티카’를 환기의 거울로 삼을 법하다.

양심과 신용의 가치는 16세기 네덜란드 상인의 일화에서 엿볼 수 있다. 러시아 고객들에게 배달할 식량을 가득 실은 배가 항해 도중 빙하에 갇히면서 선원 17명 중 8명이 굶어죽었지만, 어느 누구도 고객의 상품을 건드리지 않았다. 이 신용 덕분에 네덜란드는 17세기를 지배했다.

역사는 거울이라는 이 식상하고 뻔한 명제가 이 책에서 도돌이표처럼 강조되는 것은 반복되는 패턴의 역사가 주는 교훈을 쉽게 망각하기 때문이다. 르네상스 시대에 로마인들은 ‘새로운 로마’ 건설을 위해 ‘옛 로마’를 파괴했다. 2000년대 초 서울 종로구의 피맛골도 ‘서울의 재개발’을 위해 사라졌고, 서울의 ‘역사’는 거세당했다. 무차별적인 파괴를 일삼는 21세기 새로운 반달리즘의 출현인 셈이다.

서양 역사에서 유럽 전역을 지배했던 인물은 카이사르, 샤를마뉴, 나폴레옹 등 크게 세 사람으로 압축된다. 이 중 서기 800년 서로마 황제에 즉위한 샤를마뉴는 분열된 유럽을 통합시킨 주인공으로, 세계사의 흐름을 바꿔놓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2009년 상원의원에 임명된 자크 드메르는 캐나다 스포츠 영웅 출신이다. 두 사람은 모두 문맹이다. 2005년 드메르는 자신의 부끄러운 비밀을 공개하며 캐나다 사회를 충격에 빠뜨렸지만,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학벌 공화국’ 한국은 어떤 시선으로 바라볼까.

호메로스의 전설같은 트로이 이야기를 들은 소년 하인리히 슐리만이 포기하지 않는 의지와 열정으로 트로이의 실체를 밝혀내며 학계를 충격에 빠뜨렸던 일화에선 ‘꿈’이 읽히고, 중세 유럽 최고의 대학으로 자리매김한 파리대학의 성장에 22살의 나이차를 극복한 학자 연인의 사랑이 있었다는 사실에선 ‘낭만’이 포착된다.

한니발이 치밀한 전략으로 로마와 동맹 도시를 이간질시키려는 노력이 계산 착오로 끝난 것은 그의 지략 부족이 아니라 관용과 포용을 바탕으로 한 로마의 견고한 정치적 결속력에 비롯된 것임을 역사는 ‘가르치고’ 있다.

책은 대부분 상식으로 통하는 세계사 장면에서 혹시 놓쳤던 재미있거나 깊이있는 대목들을 디테일하게 추적한다. 이 역사 여행의 결론은 결국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하는가’라는 풀기어려운 숙제를 다시 한번 고민하게 만든다.

그리고 2015년 대한민국의 오늘, 말도 안되는 비상식적 행동과 해답없이 부유하는 각종 의혹들에 대해 ‘스스로 깨우치라’고 일러주는 듯하다.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1770~1850)가 영혼을 잃은 동시대인에게 ‘영웅의 존재’를 역설하며 던진 한 편의 소네트는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필요한 경구(警句)로 다가온다.

‘밀턴, 그대야말로 우리 시대에 살아있어야 하겠다/영국은 그대를 요구함이 간절하다/지금 이 나라는 괴인 물 썩어가는 늪 같으니/교회도, 군대도, 문학도, 가정도, 웅장한 부호의 저택도/마음속의 행복을 잃었도다/아, 우리를 일으키라, 우리에게 돌아오라/그리하여, 우리에게 예의와 덕행과 자유와 힘을 달라/그대의 영혼은 아득한 별같이 고고하게 살았고/그대의 목소리는 바다같이 울렸다/맑은 하늘처럼 깨끗하고 위엄있게 자유롭게/그대는 인생의 대도(大道)를 경건한 기쁨 가운데서 걸었다/그러나 또한 가장 낮은 의무마저 피하지 않고.’

◇ 나의 서양사 편력 1, 2=박상익 지음. 푸른역사 펴냄. 308쪽/288쪽. 각 1만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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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고금평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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