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끈새책] '이중섭 편지'…아내한테 "소중해", 아들에겐 '높임말' 쓴 천재화가의 가족사랑

‘이중섭 편지’을 읽고 나서 천재 화가로 불린 이중섭(1916-1956)을 과연 전근대적 사람으로 분류할 수 있을까가 가장 큰 의문으로 다가왔다. 그가 일본인 아내 이남덕(마사코)과 두 아이 태현과 태성에게 보낸 편지 내용은 근대적 평등과 배려의 문화를 익히지 않고선 결코 습득할 수 없는 흔적들이었기 때문이다.
1952년 가난과 질병으로 어쩔 수 없이 부인과 아이를 일본으로 보낸 뒤 이중섭이 우여곡절 끝에 쓴 53년 3월9일 첫 편지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귀엽고 소중한 남덕 씨’.
그의 편지의 서두는 언제나 ‘닭살 돋는’(?) 호칭이었다. ‘예쁘고 소중한 내 사람이여’ ‘가장 아름답고 소중하고 또 소중한 내사랑 내 기쁨의 샘 남덕 씨’. 가부장적 질서가 확실했던 당시 시절을 떠올리면 흔치 않은 표현인 셈이다.
그는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서 ‘소중하다’는 표현을 서두로 가장 많이 썼고, 아이에게 보낸 편지에선 경어를 잊지 않았다.
이중섭은 예술가에게서 쉽게 찾아보기 힘든 안정적인 정서와 교감 능력을 소유하고 있었다. 산꼭대기에 지은 판잣집에서 바람을 이기고 살기 힘들 정도로 사경을 넘은 ‘대향’(이중섭의 호)은 곧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을 만날 수 있다는 희망과 새로운 생명을 내포한 새로운 세계를 지향하는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바람 하나만으로 참아왔다고 적고 있다.
‘사랑과 배려의 화신’이라는 면모는 어느 편지에서나 한결같았다. “그대들 곁에만 있을 수 있다면 얼마든지 훌륭한 대작을 거침없이 만들어낼 자신이 가득하오.”(53년 3월 말경)
이 책은 서사가 뒤엉켜 오독될 가능성이 높은 서신을 날짜순서와 (이중섭의) 이동 행로에 맞게 고쳐 배열했다. 1980년 일본어로 쓰인 편지가 처음 번역돼 공개됐지만, 편지의 순서를 정렬하고 동선에 따라 이야기를 순차적으로 정리해 복원한 것은 35년 만이다.
이중섭이 부인에게 쓴 편지 중 우리가 읽을 수 있는 것은 모두 39통이다. 여기에 두 아이에게 보낸 편지까지 합하면 60여 통에 이른다.
책은 크게 부산(1953년 여름), 통영(53년 가을~54년 6월), 서울(54년 6월~55년 2월), 대구(55년 2월~56년 9월6일) 순으로 그의 행적을 좇았다. 삶이 자연스럽게 작품과 연결되는 순환 고리를 찾으려는 의도인 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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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과의 이별 초창기엔 이중섭도 예술가의 예민한 성격을 드러낸다. 사흘에 한 번은 편지 보내달라는 부탁을 아내가 제대로 들어주지 못하자, 그는 “왜 이런저런 이유만 늘어놓으시오. 우표 살 돈이 없다는게 말이나 되오?”라고 윽박지른다. 하지만 이내 다음 편지에서 순한 남편의 모습으로 돌아온다. “오로지 그대만을 뜨겁게 사랑하기에 그대에게만 심한 요구를 하는 것이라오.”
가족에 대한 차고 넘치는 사랑은 예술과 예술인의 정체성에 대한 해답도 알려준 듯하다. 그는 “정직한 화가라는 사실을 반드시 믿어달라”고 아내에게 부탁했고, 예술은 끝없는 사랑의 표현이라며 “진정한 사랑으로 가득 찰 때, 비로소 마음은 순수와 청정에 이를 수 있는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토록 가족에 대한 애정이 넘쳤던 이중섭도 숨을 거둘 땐 곁에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그 순간까지도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그린 그림에 사랑의 언어를 실어 나른 두 아이의 아버지였고, ‘소중한’ 아내를 그윽이 사랑한 남편이었으며 순수의 열정이 아니면 붓을 들지 않았던 정직한 화공이었다.
◇'이중섭 편지'=이중섭 지음. 양억관 옮김. 현실문화 펴냄. 272쪽/1만38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