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배트맨 시리즈' 전 작품 제작총괄한 마이클 E. 우슬란…"창의적 꿈 지켜준 나의 슈퍼히어로는"

만화책이 잔뜩 쌓여있는 컴컴한 지하실. 기대감으로 터질 것 같은 심장을 부여잡고 텔레비전 앞에 앉았던 10대 소년은 절망의 나락에 빠져버렸다. 그의 만화 영웅 '배트맨'이 텔레비전 시리즈가 돼 나타난 첫 방송에서 전 국민의 웃음거리로 전락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펑' '푹' 효과음과 함께 '몸 개그'를 하는 캐릭터가 돼 버린 영웅 앞에서 그는 일생일대의 결단을 한다. 배트맨을 살려내고야 말겠다고. 실추된 명예를 회복시키고,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이자 진지하고 철학적인 그의 영웅을 되살려 내겠다고.
14일 한국을 찾은 마이클 E. 유슬란(64) '배트맨 시리즈' 제작자 이야기다. 그는 최근 아시아 전역을 돌아다니며 자신이 가진 노하우를 공유하고 있으며 이번에는 한국콘텐츠진흥원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유슬란은 "마치 영화 속 브루스 웨인이 피가 낭자한 부모의 시체 앞에서 평생의 결단을 하는 장면처럼 비장했다"고 웃으며 그때를 회고했다. 어린 마이클에게는 망가진 배트맨의 모습이 그 정도로 심각한 충격이었다.
이날 이후 그는 할리우드에서 새로운 배트맨 영화를 만들어내겠다는 일념 하나로 살아왔다. 28세에 파트너와 함께 DC코믹스로부터 만화 배트맨의 영화 판권을 따낸 뒤 '어둡고 진지한 히어로물'을 만들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할리우드 제작사들의 문을 두드렸다.
◇진지하고 어두운 만화 캐릭터? "할리우드는 '미쳤다' 했지만…"
"다들 저보고 미쳤다고 했어요. 최악의 아이디어라고 했죠. 만화 캐릭터를 진지하고 어둡게 그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거든요.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인식이 팽배했고, 이 모든 것은 제가 넘어야 할 산이었어요."
그러나 5살 때부터 오타쿠 짓(?)을 시작한 그에게는 믿음이 있었다. 다른 어떤 캐릭터보다도 '배트맨'은 특별하다는 생각이었다. 능력을 타고나지 않았으며, 원하지 않지만 세상을 위해 영웅이 되어야 하는 그의 운명 때문이었다. 마이클은 브루스 웨인이라면 아무 생각 없이 영화관을 찾았던 관객들도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존재론적인 질문을 던질 수 있게 만들 거라고 믿었다.
거의 종교 수준에 가까웠던 그의 배트맨 사랑은 팀 버튼과 크리스토퍼 놀란이라는 천재 감독들을 만나며 현실화되기 시작했다. 유슬란은 "팀 버튼은 '영화 배트맨은 배트맨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라고 내게 항상 말했다"며 "그 덕에 삶의 여정 속에서 길을 잃은 고독한 개인 브루스 웨인을 그려나갈 수 있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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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꿈꾸던 수호자 배트맨이 불러온 거악 '조커'. 이 캐릭터를 '다크나이트'에서 역대 최고로 그려냈다는 평을 받고 있는 크리스토퍼 놀란에 대해서도 유슬란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영화를 보면 배 안에 탄 사람들이 도덕적 선택의 기로에 직면하는 장면이 나와요. 조커가 시키는 대로 다른 배를 폭파시키고 내가 살 것인가, 아니면 내가 죽을 것인가. 만화가 이렇게 진지한 고민을 던져주고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는 말했다.
◇배트맨 시리즈 만들 수 있었던 힘 '어머니'와 '선생님'
한국에서도 저런 오타쿠 어린이가, 콘텐츠 제작자가 탄생할 수 있을까. 일찌감치 배트맨 만화책을 빼앗기고 줄줄이 학원 수업을 받으러 다니지는 않았을까. "배트맨 시리즈 같은 콘텐츠를 만들 제작자를 키워내기 위해, 아이들은 어떻게 커야 한다고 보느냐"고 물었다.
그는 얼굴 한가득 미소를 지으며 교육방법 대신 자신의 어린 시절 영웅 두 사람을 소개했다. "내가 어릴 적, 사회 분위기가 만화를 죄악시하고 불태우기까지 하는 분위기였다"며 "그런데 우리 어머니는 오히려 '만화는 나쁜 것이 아니고 상상력을 풍부하게 해줄 것'이라며 내게 읽어줬다"고 말했다.
그는 "학창시절 영어 선생님의 경우 내가 교과서 아래 '엑스맨' 만화책을 숨겨 읽다 들켰을 때 친구들이 비웃자 '마이클이 단어도 많이 알고 작문도 잘 하는 건 만화 덕분'이라며 오히려 내 편을 들어줬다"며 "이 두 사람은 만화를 사랑하는 제가 창의적인 꿈을 계속 꿀 수 있도록 보호해 준 슈퍼히어로였다"고 회고했다.
이렇게 미국 뉴저지주의 한 작은 마을에 살던 블루칼라 노동자 가정의 아들, 배트맨 오타쿠 어린이의 꿈은 반세기가 지나 현실이 됐다. 그가 밀어붙인 배트맨의 모습은 그가 38세이던 1989년 팀 버튼 감독의 '배트맨'을 시작으로 세상에 나와 16차례 영화화되며 전 세계를 사로잡았다.
그는 요새 아들 데이비드 유슬란과 마블 코믹스의 스탠 리 명예회장과 함께 온라인 무료 콘텐츠 강연을 한다.
"미국 히어로들은 곧 지겨워질 거예요. 세계는 한국에서 새로운 문화와 철학을 가진 캐릭터가 나오길 기대할 겁니다." 그가 우리에게 던지고 간 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