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뜩이나 먹고 살기도 피곤한데 정치판의 진흙탕 싸움에 염증이 난다"고 할 일이 아니다. "찍을 자가 없다"고 투표권을 내팽개쳐 버릴 일도 아니다. 대통령선거가 근사하고 품격 있는 행사여야 한다는 생각부터 버리자.
후보자들이 분바르고, 변장하고, 가면을 쓰더라도 가급적 발가벗겨야 하는 것이 유권자의 권리이자 의무다. 유권자는 가만히 있는데 후보자들끼리 서로 발가벗겨 준다면 더없이 고마운 일이다.
대통령선거가 아니었다면 위장취업으로 빼돌린 세금을 토해내게 할 수 있었을까. 병역을 피한 자녀가 외딴 섬에 가서 봉사활동이라도 했을까. 비정규직 자녀 몫으로 돼 있던 주식을 아버지에게 되돌려 주었을까. 주식시장에서 벌어진 수상한 사건이 이처럼 낱낱이 알려질 수 있었을까. 대통령선거가 아니라면 검찰이 국세청장을 감히 구속하는 일이 벌어질 수 있었을까.
선거가 끝나면 후보자들은 가면을 벗고 권력자의 모습을 드러낸다. 유권자들은 힘 없는 민초로 돌아간다. 궁금해도 물어볼 수 없고 수상해도 뒤져볼 수 없다. 5년이 지나야 "존경하고 사랑한다"는 말을 다시 듣게 될 것이다.
선거가 끝나면 권력자들은 휴전하고 타협한다. 승자든 패자든 타협하지 않으면 "정치력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대통령과 언론이 맞장을 뜨거나 검찰과 경찰, 법원, 국세청이 맞붙는 일은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반대로 대통령이 잘 도와주는 검사들을 출세시켜 주면서 '기강'을 잡거나 언론사 사주를 만나 "뭐든지 도와줄 테니 잘 부탁한다"고 손을 내밀기 쉽다.
역설적이지만 권력자들이 서로 물어뜯고 싸울 때 민초들은 안심해도 좋다. 조용한 권력자들은 수상하다. 그들이 뒷거래를 통해 은밀히 이익을 나누는 것을 경계해야 하지만 평소에는 쉬운 일이 아니다.
대통령선거는 5년마다 맞는 비리 예방주사인 셈이다. 80년 체육관에서 '대통령'을 도둑맞은 이후 4차례 대통령선거를 치렀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지만 그 결과 특권과 성역이 많이 무너졌다. 아직도 권력형 비리는 없어지지 않았지만 예전처럼 공공연하지는 않다. "세상 많이 깨끗해졌다"고들 한다. 최고권력자에 대한 통과의례인 대통령선거의 여과기능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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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나라의 품격 있는 대통령선거가 부럽기도 하다. 누가 더 존경스럽고 훌륭한 후보인지 고르고 싶다. 그러나 불행히도 지난 대통령선거를 되돌아보면 고개를 흔들게 한다. 자식들을 전쟁터 맨 앞줄에 내세운 로마 지도자들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기대하지 않더라도 편법·탈법을 앞장서서 저지르지 않았을까 전전긍긍해야 할 처지다.
"에~라 투표는 뭐하러. 하루 놀러나 가야겠다"는 말이 또 들린다. 역대 대통령선거 가운데 투표율이 가장 낮을 것이란 전망도 있다. 이번 대선은 어느 때보다 어지럽고 피곤한 게 사실이다. 투표일을 20일 앞두고도 안개가 잔뜩 끼어 있다.
이제 불과 며칠 앞으로 다가왔다. 기왕 부대끼는 김에 대통령선거를 즐겨보자. 지금부터라도 두 눈 부릅뜨고 후보들의 정책에 얼마나 속임수가 들어 있는지, 약속을 지킬 믿을 만한 사람인지 꼼꼼히 따져보자. 공짜 점심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