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T시평] 이젠 국가가 '의리' 보여 줄 때다

[MT시평] 이젠 국가가 '의리' 보여 줄 때다

진양곤 기자
2014.06.11 07:25

배우 김보성씨로부터 시작된 의리신드롬이 화제다. 의리의 사전적 정의는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마땅히 지켜야 할 바른 도리'다. 의리의 인물하면 예양의 스토리를 빼놓을 수 없다. 사마천의 '사기' 자객열전에 나와 있는 예양의 이야기는 대충 이러하다.

 

진나라 지백의 가신 예양은 주군이 조나라 양자와의 전투에서 패하고 죽자 그는 주군의 복수를 위해 조양자를 죽이기로 마음먹는다. 궁중의 뒷간 청소 일을 하면서 암살을 도모하다 발각되나 조양자의 용서로 목숨을 건진다. 그 다음엔 걸인행세를 하며 기회를 엿보다 또다시 잡힌다. 이 장면에서 조양자와 예양의 대화는 눈물겹도록 아름답다.

"왜 이다지도 죽은 지백을 위해 목숨을 바치려 하느냐?"

 "나를 평범하게 대했던 그전의 주군들과는 달리 지백은 나를 인정해 주었기 때문이오."

 "지백을 향한 그대의 충성은 그만하면 됐다. 나 또한 그대를 충분히 용서한 바 있다. 이제 예양은 죄를 받아야 하니 마지막 할 말이 있으면 하라."

 "나 이제 죽어서 주군을 만나러 가는 길, 그대의 갑옷이라도 베고 갈 수 있도록 해주시오."

이에 조양자는 자신의 의복을 내오게 하여 예양에게 주었고 예양은 세 번 칼질을 한 후 자결하니 이 이야기를 들은 선비들은 모두가 울었다고 한다. "사나이는 자기를 알아주는 이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여자는 자기를 사랑해주는 이를 위해 화장을 한다"는 유명한 말 또한 예양의 이야기와 함께 전해진다.

예양의 의리가 감동을 주지만 공시적 해석을 유보한다면 당시 정의에 더 가까웠던 조양자를 암살하려 한 것은 정당성 문제가 남는다. 의리가 곧 정의를 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시대정신을 외면하고 비리와 결합한 의리는 우리를 조폭사회로 인도하는 악의 원심력으로 작용한다. 정의롭지 못한 의리는 부당한 패거리의 정신적 연대에 불과한 것이다.

위안부를 폄훼하고 진실을 외면하는 것이 국가에 대한 의리라 생각하는 일본 극우세력의 행태가 좋은 예다. 자유와 민주를 짓밟은 1980년 신군부의 빗나간 전우애, 지역을 갈갈이 찢어놓은 한 마디 "우리가 남이가", '10만성도 다 잡아가도 유병언은 우리가 지킨다'는 현수막, '관피아' '해피아' 이러한 것들 또한 의리로 포장된 불의의 또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

이제 국가와 국민 사이의 의리를 얘기해 보자. 대부분 대한민국 국민은 인권과 민주의 가치를 실천하면서 성숙한 민주시민으로서의 자긍심을 갖고 살고 있다. 병역과 납세 의무를 다하는 등 국민으로서 국가에 대한 의리를 충실히 이행하고 있다. 독재를 타도하고 민주화를 이뤄낸 것, 세계 10위권 무역대국, G20 가입, 한류. 이 모든 것은 국민이 국가에 대한 의리를 다한 결과이자 증거이기도 하다.

이제 국가에 대한 의리를 다하는 필부가 국가에 묻는다. 올 겨울의 끝자락 서울에서 세 모녀가 가난 때문에 자살했고, 봄엔 꽃다운 아이들이 "엄마 아빠 미안하고 사랑한다"며 죽어갔다. 이밖에 국가가 의리를 다하지 못해 안타까운 죽음은 많다. 국민으로서의 의리를 다하고자 치열하게 살았던 생명들이 신음하고 절규할 때, 국가는 세금으로 강의 모래를 팠으며, 퍼올린 모래의 양만큼 가난에 절망하는 구조는 고착화되었다. 국가는 국민에 대한 의리를 다했는가?

지방선거가 끝났다. 정치인 모두 국민의 목소리를 겸허히 수용하겠다고 한다. 의리는 호혜적일 경우에 한해 지속성이 담보되는 법. 이제 국가, 그대가 의리를 보여줄 때다.

안타까운 죽음 앞에서 눈물 흘리고, 대통령의 눈물을 보며 또 눈물 흘리는 그런 착하고 순박한 국민들이, 위대한 그대의 시민들이 절망하고 있다. 시혜가 아닌 의리, 인간과 생명에 대한 따뜻한 시선으로, 역사 앞에 당당할 수 있는 그런 국가의 의리를 보여주기 바란다. 그것만이 국가와 운명을 함께한 국민들의 상처를 제대로 치유하는 길이 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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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희 기자

안녕하세요. 편집국 천상희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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