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인공지능 시대의 도량형(度量衡) 이야기

[기고]인공지능 시대의 도량형(度量衡) 이야기

전응길 산업통상자원부 국가기술표준원 적합성정책국장
2025.05.16 05:05
전응길 산업통상자원부 국가기술표준원 적합성정책국장
전응길 산업통상자원부 국가기술표준원 적합성정책국장

고려시대에는 법률·소송·재판을 담당하는 형부(刑部)에서 도량형(길이, 부피, 무게)에 대한 사무를 매우 엄격하게 관리했다. 조선시대 세종대왕은 저울, 되, 자 등을 제조해 전국적으로 배포함으로써 계량과 측정의 기반을 마련했다. 지금도 매년 10월 26일을 계량측정의 날로 정해 이를 기념하고 있다. '경국대전'에서는 도량형의 일률적 사용을 엄격히 규정했으며 이를 어긴 자는 형벌을 받았다. 이는 백성 간의 분쟁을 줄이고 세금 부과나 국가 행정의 정확성을 확보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처럼 계량과 측정의 정확성은 고려시대, 조선시대에도 '국가의 질서'이자 '백성과의 신뢰'였다.

인공지능 시대는 데이터의 시대다. 데이터의 시대는 누구나 믿을 수 있도록 바르고 정확하게 공통된 단위로 측정하고 계량하는 것이 그 기반이다. 즉 계량과 측정은 인공지능 시대를 지탱하는 사회의 근간이 되는 것이다. 예컨대 인공지능이 품질이 낮은 또는 잘못된 데이터로 학습할 경우, 그 판단이 왜곡될 수밖에 없다. 또한 자율자동차의 측정 오류는 대형 인명 사고로, 디지털 의료기기의 측정 오류는 의사의 오진과 환자의 사망으로 이어질 수 있다.

스마트시티, 스마트공장, 스마트팜 등 미래 첨단산업은 "센서 네트워크"와 "실시간 데이터 수집"에 의존하고 있다. 이 때 중요한 것은 단순히 데이터를 모으는 것이 아니라 그 데이터가 얼마나 정확하고 일관된지를 관리할 수 있는 시스템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국가의 계량·측정 제도가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된다. 계량·측정의 중요성은 실패의 사례에서 극명하게 보여준다. 대표적인 예로 측정 오류가 1999년 미국 NASA의 화성 탐사선 '마스 클라이밋 오비터'의 궤도 진입 실패의 요인 중 하나로 지적된 일이다. 지상 관제팀은 야드 파운드 단위계(영국식)를, 탐사선 개발팀은 다른 단위인 미터법(SI 단위계)을 사용했고 이 차이를 조율하지 못해 측정 단위의 불일치를 초래했다. 그로 인해 3억2000만 달러(약 4천억 원) 규모의 프로젝트가 소리 없이 사라졌다.

계량과 측정은 공기와 물처럼 소중하지만 자연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노력으로 안정되며 기술과 사회의 발전에 따라 성숙해진다. 고려, 조선시대에는 길이, 무게, 부피가 기본 단위였으나, 오늘날에는 시간, 온도, 전류, 광도, 물질량계 등이 기본 단위로 추가되었다. 이에 따라 법정 계량의 범위는 조선시대의 저울, 자, 되에서 현재의 저울, 수도·온수·가스·LPG·오일·요소 미터, 전력량계, 주유기, 전기자동차 충전기 등 13개 종으로 변화·확대됐다. 특히 전기차 보급에 따라 정부는 2020년도에 전기자동차 충전기를 법정 계량기로 추가 지정했으며 2027년부터는 전국에 있는 약 13만 개의 전기자동차 충전기 전체에 대한 재검정을 시작할 계획이다. 이와 더불어 수소자동차 보급의 확대됨에 따라서 수소자동차 충전기에 대한 법정 계량제도 도입도 매우 시급한 상황이다.

인공지능 시대의 기반인 계량과 측정은 디지털 전환에도 적극 대응해야 한다. 계량기기의 디지털화, 스마트미터 기반 계량 관리 고도화, 인공지능 기반 계량기 오작동 탐지 기술이 필요하다. 그리고 측정데이터의 정합성과 투명성을 확보하기 위해 계량·측정 정보의 디지털 통합플랫폼도 시급히 구축해야 한다. 또한 글로벌 사회가 연결된 디지털 시대에는 계량과 측정의 국제협력도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AI와 데이터가 글로벌하게 연동되는 시대에는 국내 기준만으로는 신뢰를 확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국제법정계량기구(OIML), 국제도량형총회(CIPM), 아시아태평양법정계량포럼(APLMF), 아시아측정기구(APMP) 등과의 협력 확대를 통해 우리나라의 측정 기술이 글로벌 수준에서 인정받을 수 있도록 정합성과 투명성을 강화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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