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험은 가장 정직한 증거다.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관리를 위해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하고 공정한 정책 설계도를 마련하는 일만큼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우리가 이미 방폐물을 안전하게 관리해 온 '실제 경험'을 확인하는 일이다. 고준위 방폐장에 대한 막연한 불안을 해소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 역시, 지난 10여 년간 경주 중·저준위 방폐장이 축적해 온 안정적인 운영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2015년 본격적인 운영을 시작한 경주 중·저준위 방폐장 동굴처분시설(10만 드럼 처분)은 한국 원자력 산업사에서 갈등을 넘어선 상생의 이정표로 평가받는다. 지하 80~130m 깊이의 견고한 암반 속에 구축된 6기의 대형 사일로(Silo)는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단 한 건의 방사선 누출 사고 없이 묵묵히 제 자리를 지켜왔다. 이곳은 원전 폐기물뿐만 아니라 전국 병원과 연구기관, 산업 현장에서 발생하는 방사성동위원소(RI) 폐기물까지 안전하게 격리·처분하며 그 전문성을 입증하고 있다.
이러한 성과는 국제적 수준의 엄격한 안전관리 체계가 뒷받침됐기에 가능했다. 한국원자력환경공단은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방폐물 관리 원칙을 준수하며 국내외 기술 기준에 부합하는 최첨단 관리 시스템을 운영 중이다. 특히 폐기물의 발생부터 최종 처분에 이르기까지 모든 단계의 안전성을 확보하기 위해 국제 표준인 폐기물 인도기준(WAC)을 엄격히 적용하고 있다. 이는 한국의 방폐물 관리 기술이 이미 세계적 수준에 도달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운영의 핵심 원칙은 '투명성'에 있다. 경주 처분시설 주변 방사선환경조사는 지방자치단체와 전문가, 지역 주민이 직접 참여하는 민관 합동 감시 체계 아래 이뤄진다. 인근 바닷물과 토양, 농산물에 대한 정기적인 조사 결과는 조금의 숨김없이 공개된다. 특히 작년 경주 APEC 정상회의 기간에는 주요 시설과 문화재에 대한 선제적인 방사선 측정을 시행해 국가적 행사의 안전을 뒷받침하기도 했다. 또한 각종 지원사업의 지속적인 이행을 통해 공단과 중·저준위 방폐물 관리사업에 대한 지역주민의 신뢰구축의 마중물이 됐다.
이제 공단은 중·저준위 방폐장 운영에서 축적한 경험을 바탕으로 한 단계 높은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 올해 표층처분시설(12만 5000 드럼 처분) 운영을 시작하게 되면 우리나라는 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복합 처분시설 체계'를 갖추게 된다. 여기에 인공지능(AI)과 디지털 기술을 활용한 안전관리 고도화로 더욱 정교한 시스템을 구축해 나갈 계획이다.
또 공단은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특별법' 제정을 계기로 본격적인 고준위 방폐장 부지선정에 착수하는 한편 태백 연구용 지하연구시설(URL)의 성공적인 건설과 운영을 증명해야 한다. 그리고 모든 사업추진과정에서 예상되는 각종 갈등을 관리해야 하며 지역사회와의 상생협력 모델도 구체화하고 제도화해야 한다.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 가이위사의(加以爲師矣)'라는 말이 있다. 인정받는 사람(師)이 되려면 우선 과거(故)로부터 배우고 그것을 토대로 새로운 것(新)을 익혀야 한다고 풀이할 수 있다. 경험에 그치는 것을 경계하는 문구이자 무모한 도전을 경고하는 문장이다. 공단은 지난 16년 동안의 소중한 경험을 토대로 새롭게 당면한 사명을 완수해야 한다. 과거의 경험을 갖고 미래의 새로운 사명을 감당해야 할 현재의 공단은 '선량한 관리자의 주의의무'를 다하는 전담기관의 각오를 다져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