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현듯 스쳐 지나갔지만 그 순간에도 인상에 남았다. 아쉬움을 곱씹을 만큼 어여뻤던 여성이었다. 고향 가는 버스를 기다리며 벤치에 앉아있는데, 유리창 너머에 그 여자가 다시 한번 나타났다. 그 모습이 사라질까 두려워 수첩 속에 빠르게 그림으로 담았다. 그리고 남자는 여자를 마음 속에 저장했다. 운명 같은 우연이 거듭된 두 사람의 첫 만남, 은호와 정원의 첫사랑은 그렇게 시작됐다
100만 관객을 동원하며 역주행 흥행 중인 영화 ‘만약에 우리’는 뜨겁게 사랑했던 ‘은호’(구교환)와 ‘정원’(문가영)이 10년 만에 우연히 재회하며 기억의 흔적을 펼쳐보는 멜로 드라마다. 대학시절부터 시작되는 두 사람의 사랑은 얼핏 보면 은호의 감정을 따라 전개된다. 은호가 정원을 짝사랑하며, 절실히 원했다. 오랜 기다림 끝에 결국 사랑을 시작했다. 하지만 사회 생활, 가진 재산, 취업 등 상황의 변화 속에 사랑이 시들어간다. 은호가 장담했던 “심장도 떼줄게”라는 밀어가 서서히 힘을 잃어 간다.
분명 은호의 사정을 따라갔건만 극장 문을 나설 때 여운을 남기는 것은 정원의 감정이다. 은호의 사랑은 결국 남자들의 죽을 때까지 못 잊는다는 첫사랑이었다. 은호 역시 영원한 추억으로 남기겠지만, 결국 다른 남자와 다를 것 없이 평범했다. 그 역시 서툴렀고, 찌질했다. 그럼에도 세월의 흐름에 추억을 보정하며, 예쁜 기억만 되새긴다. 하여 은호는 다시 만난 정원에게 “만약에”라는 가정법을 들이밀며 짙은 후회를 내비친다.

하지만 정원은 달랐다. 처음은 스쳐간 남자였지만, 결국 은호에게서 사랑의 감정을 피워냈다. 시들어가는 사랑에 눈물이 많아졌지만, 은호의 모든 것을 포용했다. 첫사랑의 끝자락에서도 그의 손길을 기다렸다. 10년 후 재회에서도 갈무리한 사랑을 가슴 한 켠에 고이 모아두고 있었다. 결국 정원은 새로운 봄을 맞이한 화초처럼 다시 한번 인생을 찬란하게 물들일 감정의 새싹을 틔운다.
그렇게 문가영은 모두의 옛사랑이 된다. 추억 속 사랑의 겉모습이야 제각기 다를 수 있다. 관객은 문가영과 함께 사랑을 시작하고, 끝맺으며, 다시 그 감정을 복기한다. 문가영은 정원을 통해 옛 시절의 내 님이 되고, 내 자신이 된다. 어여쁜 옛사랑이 흘러갔던 모든 시간대를 스크린에 수놓는다. 20대와 30대를 넘어 중년에 이르기까지, 언젠가 한 번은 지나쳤고, 애써 마음 속에 잠궈 놓았던 사랑의 자물쇠를 문가영이라는 열쇠가 고이 풀어낸다.
이제 막 30대를 시작한 문가영의 호연이라 더 기쁘다. 사실 이미 데뷔 20년차 배우다. 허나 아역 배우 시절의 특별한 경험이 반드시 좋은 배우의 자양분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성인 연기 전환에 애 먹는 경우를 우리는 수 없이 봐왔다. 문가영 역시 데뷔 이래 쉬지 않고 작품활동을 해왔다. 그럼에도 모든 작품 속에 문가영의 전부를 보여줄 수는 없었다. 허나 문가영은 시나브로 배우로서 성장하며 끊임없이 관객의 마음을 노크했다.

그래서 문가영이 ‘만약에 우리’를 만난 것이 축복이다. 독일 출생에 다양한 언어를 구사하고, 인스타그램 팔로워가 1,400만 명에 육박하며, 파격적인 의상으로 패션위크 포토월을 장식했다. 다양한 재능을 품고 늘 배우로서 우리와 함께했던 문가영은 이제 자신의 대표작을 관객의 마음에 새긴다. 바로 ‘만약에 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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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내 집이 되어줘서 정말 고마웠어” ‘만약에 우리’ 정원의 대사 중에서
이제 문가영도 자신의 집을 찾은 듯 하다. 좋은 작품과 마주했고, 자신의 사랑해주는 관객을 만났다. 이제 정원의 세상이 다시 빛을 찾은 것처럼, 문가영의 배우 인생도 더 예쁜 색으로 칠해갈 터다. 문가영이 가진 색채가 오롯이 발현됐을 때, 그때부턴 그가 우리 영화와 관객들이 머물 수 있는 집이 될 차례다. “우리 헤어져도 가끔은 보자”던 정원의 부탁처럼, 언제고 다시 보고 싶은 배우가 대문을 활짝 열고 집들이를 준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