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과 사는 남자’ 유해진, 희비극의 제왕이 되기까지

‘왕과 사는 남자’ 유해진, 희비극의 제왕이 되기까지

이설(칼럼니스트) ize 기자
2026.02.02 08:59

유배온 단종과 우정 쌓는 엄흥도 역으로 명불허전 연기
관객을 웃기고 울리며 또다시 인생작 경신

유해진이 출연한 영화 '왕과 사는 남자'에서 엄흥도 역을 맡아 21년 전 '왕의 남자'의 육갑 캐릭터와 유사한 연기를 선보였습니다. 두 작품은 시대적 배경은 다르지만 유해진의 배우로서의 성장과 다양한 연기 스펙트럼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평가받습니다.
'왕과 사는 남자' 유해진, 사진제공=쇼박스
'왕과 사는 남자' 유해진, 사진제공=쇼박스

‘왕의 남자’(감독 이준익·2005)의 사당패 육갑이가 ‘왕과 사는 남자’(감독 장항준)의 유배지 관자인 엄흥도로 돌아왔다. 제목이 비슷해서 자연스럽게 연상되는 두 작품의 시차는 무려 21년. 그러나 유해진이라는 배우를 통해 세월을 뛰어넘는 연관성을 찾아볼 수 있다.

‘왕의 남자’에서 육갑은 여러 조연 캐릭터 중 하나였다. 때로는 재치있게 때로는 진지하게 상황을 관찰하며 나름의 캐릭터를 구축했다. 하지만 사당패를 이끄는 주연 장생(감우성)이나 여장남자 공길(이준기)의 비중에 비교할 바는 못 됐다. 그저 극의 흐름을 유연하게 하는 조력자 역할에 그쳤다고 보는 게 맞다.

하지만 ‘왕과 사는 남자’의 엄흥도는 지난 20여년간 꾸준하지만 확연히 달라진 유해진의 배우로서 입지와 가치를 보여주는 인물이다. 육갑처럼 유머와 진지의 이미지를 동시에 지니고 있는데, 이번엔 충절과 비애, 회한의 정서까지 더해졌다.

'왕과 사는 남자' 유해진, 사진제공=쇼박스
'왕과 사는 남자' 유해진, 사진제공=쇼박스

‘왕과 사는 남자’의 시대적 배경은 조선 단종(박지훈) 때 계유정난(1453)이다. 훗날 세조에 즉위하는 수양대군이 문종의 측근이었던 김종서·황보인을 제거하고 단종을 폐위시킨 후 정권을 장악한 사건을 말한다. 이로 인해 어린 왕 이홍위(단종)는 상왕에서 노산군으로 강봉돼 강원 영월에 유배됐다가 시해됐다. 이 과정에서 후환을 두려워하지 않고 노산군의 시신을 수습한 인물이 바로 엄흥도다. 정적의 숙청에 서슬이 퍼렇던 세조 집권기에 목숨을 걸고 끝까지 단종에 대한 충절을 지킨 역사적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왕의 남자’ 육갑을 표현한 유해진이었다면 엄흥도와 연결짓기 어려웠을 것이다. 연극 활동을 하다가 1997년 영화 ‘블랙잭’으로 스크린에 데뷔한 유해진이 그즈음 출연한 작품은 ‘신라의 달밤’(2001)의 조연 넙치, ‘광복절 특사’(2002)의 조연 짭새, ‘공공의 적’(2002)의 단역 용만, ‘혈의 누’(2005)의 조연 독기처럼 단역이나 조연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연이라 해도 관객에게 전해지는 인상은 뭔가 달랐다. 특히 ‘공공의 적’ 시리즈에 ‘개근’ 출연했던 용만은 조연 이상의 캐릭터로 남아 있다. 조폭 출신의 칼잡이로 허세가 있지만 ‘나쁜 놈’ 같지는 않은 매력이 있었다. 극중 용만이 칼잡이 기술을 자랑하기 위해 경찰 취조실에서 손바닥을 펴놓고 나이프로 손가락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오가며 내리찍다가 실수하는 장면을 기억하는 팬들이 아직도 많다. 아무리 작은 역할이라도 완벽하게 해내기 위해 그만의 노력과 집중으로 탄생시킨 장면이었다.

‘왕의 남자’ 그리고 유해진의 진가를 결정적으로 알린 ‘타짜’(2006)의 고광렬과 ‘이장과 군수’(2007)의 군수 역 이후 유해진은 변신에 변신을 거듭하며 자신의 연기 영역을 무한 확장했다. 평범하고 소박한 외모 탓에 조폭이나 건달, 단순한 행인에 머물뻔했던 유해진은 새로운 캐릭터와 작품에 대한 도전을 멈추지 않으며 스스로 몸집을 키웠다. ‘전우치’(2009)의 초랭이로는 코믹과 판타지를 보여줬고, ‘부당거래’(2010)에선 재벌의 이익에 철저히 아부하는 냉혹한 비즈니스맨으로 탈바꿈했다. 그리고 다시 ‘공조’(2017)의 서민적이고 현실적인 수사관으로, ‘택시운전사’(2017)의 의리있고 속 깊은 동료 황태술로, ‘봉오동 전투’(2019)의 카리스마 넘치는 의병장으로, 액션 판타지 ‘승리호’의 로봇 업동이 목소리까지 한계를 두지 않았다. 심지어 ‘올빼미’(2022)에선 데뷔 이래 처음으로 왕(인조) 역할을 맡아 섬뜩한 카리스마를 뿜었고, ‘달짝지근해: 7510’(2023)에선 천진난만한 주인공 치호로 나와 김희선과의 멜로 호흡을 설득력 있게 소화했다. 코미디와 휴먼, 액션과 스릴러, 사극과 멜로 등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장르에서 전천후로 변신하는 모습을 증명한 것이다.

'왕과 사는 남자' 박지훈(왼쪽)과 유해진, 사진제공=쇼박스
'왕과 사는 남자' 박지훈(왼쪽)과 유해진, 사진제공=쇼박스

따라서 ‘왕과 사는 남자’의 엄흥도는 유해진이 아니면 상상하기 어려운 캐릭터임에 틀림없다. 강원 영월 산골마을의 촌장 엄흥도는 먹고 살기 힘든 마을 사람들을 위해 자기 마을을 유배지로 만들려고 작정한다. 유배왔다가 금의환향하는 양반 덕분에 옆 마을이 잘 먹고 잘 살게 되는 것을 목격한 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대감님’을 우리 마을로 모셔올 계획"을 세운다. 그래서 ‘모시는’ 데에는 성공하지만, 어긋난 게 있다. 하필이면 그가 왕위에서 쫓겨난 노산군이란 점. 유배된 양반 덕을 보려던 엄흥도의 계획은 완전히 꼬인다. 절망에 빠진 노산군은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만 하고, 한양에선 제대로 보고를 하지 않으면 엄하게 다스린다고 엄포를 놓는다. 잘못 골랐다고 생각할 무렵, 마을 사람들의 정성에 노산군이 차츰 마음의 문을 열고, 엄흥도도 인간적인 정을 주고 받으면서 스토리는 코미디로 시작해 휴먼을 거쳐 서서히 비극으로 치닫는다. 희극과 비극의 믹스. 장르의 융합이다.

웃었다 울어야 하는 이야기 구조에서 이를 부드럽게 이어줄 연기자로 다른 배우가 생각나지 않을 만큼 유해진은 온·냉탕을 오가는 두 얼굴로 관객을 쥐었다 놨다 한다.

엄흥도가 영월군수(박지환) 앞에서 노산군이 화살 한 방으로 호랑이를 때려잡은 일화를 무용담처럼 늘어놓을 때, 유해진의 연기는 빛을 발한다. 얼굴은 터질 듯이 팽창돼 있지만 절대 과하지 않은 제스처로 대사를 속사포처럼 쏟아낸다. 박지환과의 ‘티키타카’, 중간중간 조금씩 섞어내는 익살이 배꼽을 잡게 한다.

'왕과 사는 남자' 전미도(왼쪽)과 유해진, 사진제공=쇼박스
'왕과 사는 남자' 전미도(왼쪽)과 유해진, 사진제공=쇼박스

반면 노산군이 또 자결을 시도하려는 줄 알고 뛰어가서 멱살을 잡고 하소연하는 장면에선 분위기가 싹 바뀐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코미디를 걷어내고 울분과 절박함을 토해낸다. 엔딩에서 노산군과의 마지막 약속을 손수 지키는 장면에선 눈시울이 붉어진다.

유해진은 대본이 너덜너덜해지도록 읽고, 메모하는 배우로 알려져 있다. 캐릭터를 분석하기 위해 대본을 근거로 인물을 재창조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는 것이다. 애드리브에도 능숙해 보이지만 실은 사전에 충분히 ‘합’을 맞춘 결과다. 철저한 계획과 연습, 고민이 ‘어떤 역할이든 다 가능한’ 지금의 주인공 유해진을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먼 길을 걸어온 유해진은 이제 편안하고 여유 있는 얼굴을 보여주고 있다. 이를 보는 관객들의 마음도 뿌듯하고 충많다. ‘왕과 사는 남자’는 2월 4일 개봉한다.

이설(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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