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대표 출마해 장충금 100억원 꿀꺽하려는 조폭 박해강역 열연
모든 출연배우들과 꿀케미 이루며 명불허전 연기

제목은 작품과 시청자가 처음 만나는 약속이다. 그렇기에 제목이 주는 기대는 생각보다 크다. 특히 한국인에게 ‘아파트’라는 단어는 단순한 주거 공간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누군가에게는 가장 안전한 보금자리이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부의 상징이다.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욕망과 경쟁이 뒤엉킨 작은 사회다.
자연스럽게 JTBC 주말드라마 ‘아파트’(극본 김윤영, 연출 조용원)?라는 제목을 처음 접했을 때 기대하게 되는 건 아파트라는 공간 안에서 벌어지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한국 사회의 축소판과도 같은 아파트를 어떻게 그려낼지 궁금해지는 제목이다.
막상 첫 회를 열면 예상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펼쳐진다. 주인공인 박해강(지성)은 전국구 조폭 보스 출신으로 VIP들만 출입할 수 있는 비밀 도박장을 마치 잘나가는 IT기업처럼 세련된 외형을 갖춘 근사한 사업체로 둔갑시켜 능력을 뽐낸다. 코미디와 범죄극이 결합된 설정은 익숙하지만, 제목으로 기대감을 주던 ‘아파트’라는 공간은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고개를 갸웃하게 만든다.

그러다가 엔딩에 이르러서야 제목과 본편의 연결고리가 보이기 시작한다. 박해강이 경찰청 고위 관계자에게 100억 원을 마련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고 그 돈을 마련할 방법으로 아파트 장기수선충당금을 건드리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돈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입주민대표회의(입대의) 회장이 되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아파트’라는 제목이 비로소 빛을 발하며 이 작품의 진짜 매력을 본격적으로 보여주는 회차는 3회다. 회장 선거를 위해 먼저 동대표가 되어야 하는 박해강은 입주민들의 표를 얻기 위해 단지 내 택배 서비스를 강행한다. 얼핏 보면 황당한 설정이지만, 그 과정에서 등장하는 아파트 생활의 디테일은 상당히 현실적이다.
아파트 주민들의 이해관계, 경비원과 입주민 사이의 관계, 단지 내 택배 차량 출입을 둘러싼 현실적인 문제까지 그동안 뉴스 사회면에서 숱하게 들어왔던 아파트 단지 내 다양한 에피소드들이 비로소 이야기의 중심으로 들어온다.
4회 역시 마찬가지다. 조폭 출신이라는 과거가 드러나며 회장 선거에서 위기를 맞은 박해강은 지하철 입구 단지 앞 유치를 위해 집회를 이끌던 장숙진(문소리)과 손을 잡는다. 이 과정에서 개발 지역 내 역사 유물 논란을 만들어 개발 계획을 뒤흔들고, 결과적으로 아파트 가치를 높이는 데 성공하면서 회장 자리에 오르게 된다. 현실적으로 따져보면 허무맹랑한 부분이 적지 않지만, 흥미로운 것은 그 소재 자체다.

지하철역 위치 하나가 아파트 가격을 좌우하고, 개발 계획 하나가 주민들의 이해관계를 갈라놓는 모습은 실제 신도시와 재개발 현장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풍경이다. 드라마는 그것을 과장하고 비틀어 블랙코미디로 만든다. 다만 이 작품이 계속해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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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으로 소비하기에는 박해강의 출발점이 결코 가볍지 않다. 그가 노리는 것은 결국 평범한 입주민들이 모은 장기수선충당금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다들 신경 쓰지 않는 눈먼 돈이라고 하지만, 누군가의 생활과 안전을 위해 쌓아온 돈을 도둑질하겠다는 설정은 분명 불편한 지점이 있다.
그럼에도 ‘아파트’에 시선이 집중되는 이유는 단연 배우 지성이다. 무엇보다 블랙코미디의 웃음 뒤에는 반드시 균형감이 필요한데, 지성이 그 미묘한 균형을 유지하며 작품에 설득력을 불어넣고 있다.
조폭 출신이라는 거친 설정부터 입대의 회장이 되기 위해 뭐든 하겠다는 현실감 없는 코믹 설정에 이르기까지 박해강이 보여주는 면면을 지성이 아니었다면 쉽게 공감하지 못했을지 모른다. 드라마의 허점을 인간적인 빈틈인 양 자신의 매력으로 채우며 시청자들을 화면 앞에서 떠나지 못하게 하는 게 지성의 힘이다.

더욱이 지성은 박해강이 끝까지 나쁜 마음이지는 않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품게 한다. 3회에서 경비원에게 폭력을 행사하던 입주민을 응징한 에피소드에서 박해강은 단순한 사기꾼이 아니라 변화 가능성을 가진 인물로 보였다.
택배 영웅에 그치는 게 아니라 아파트 영웅이라는 환호에 해맑게 웃는 박해강은 장기수선충당금을 끝내 해먹을 인물이 아니라 아파트 단지의 부조리를 걷어낼 진짜 영웅으로 거듭날 수 있을지 모른다고 기대하게 한다. 이 같은 기대감은 드라마의 방향성이 되어 재미와 불편함이 공존하는 ‘아파트’를 끝까지 지켜볼 수 있게 하는 힘으로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지성은 타고난 비주얼과 노련한 연기력은 말할 것도 없고, 이번 드라마에서는 한층 더 여유로워진 케미스트리로 드라마의 빈 공간을 꽉꽉 채우는 마법을 일으키고 있다. 그와 형제라인을 이루는 황희, 정순원과도 물론이고, 여주인공 하윤경과의 티키타카도 신선하다. 여기에 연기파 문소리나 박병은까지 있어서 이들의 호흡만으로도 ‘아파트’는 계속 봐야 하는 드라마가 된다.

결국 ‘아파트’는 이제야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다. 아파트라는 공간이 가진 현실성과 블랙코미디의 상상력, 그리고 그 중심을 흔들림 없이 붙드는 지성의 존재감이 맞물리면서 제목이 품었던 기대도 점차 설득력을 얻고 있다.
앞으로 남은 과제라면 웃음과 사람 이야기를 끝까지 함께 품어내는 일일 텐데, 지금까지 지성이 보여준 저력이라면 그 가능성을 기대해 볼 만하다. 시청자들 역시 블랙코미디의 유쾌함과 공동체를 향한 따뜻함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는 ‘아파트’가 지성을 통해 완성되는 모습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다.
조성경(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