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격적인 연기변신에 호평세례

맑고 무해한 얼굴로 청춘의 성장통을 그리던 소년은 없었다. 9년 만에 엄마 앞에 불쑥 나타난 청년은 거칠고 메마른 숨을 내쉬며 관객의 숨통을 조여온다. 영화 '실낙원'(감독 연상호)에서 배현성이 꺼내 든 얼굴은 그가 지금까지 한 번도 내비친 적 없는 낯설고 서늘한 심연이다.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의 우직한 정현이나 '조립식 가족'의 해사함을 기억하는 이들에게 '실낙원'에서 보여준 변신은 신선한 충격이다. 선악의 경계가 붕괴된 연상호 감독의 세계관 한가운데서, 배현성은 온전히 자신만의 날 선 호흡으로 '진짜 아들' 류선우를 체화해 냈다. 익숙한 틀을 깨고 배우로서 새롭게 눈을 뜬 배현성을 만났다.
# '실낙원', 연기 인생 최고의 도전
배현성은 데뷔 이후 수없이 많은 캐릭터를 연기했지만 선우라는 인물을 처음 마주했을 때, 그가 직관적으로 느낀 것은 '전혀 다른 도전'이라는 설렘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극단적인 악성을 어떻게 납득 가능한 인물로 형상화할 것인가에 대한 깊은 고민이 뒤따랐다.
"대본을 읽으면서 기존에 보여드렸던 제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결이라 일차적으로 매력을 느꼈어요. 처음에는 선우가 거칠고 무서운 역할이다 보니 아주 강하고 세게 표현해야 하나 싶었죠. 그런데 그렇게 단순하게 접근하면 재미도 없고 캐릭터의 진짜 매력이 살지 않을 것 같았어요. 오히려 행동을 차분하고 느리게 가져가고, 나른한 무드를 주면서 사람들을 집중시키면 '제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데서 오는 서늘한 공포'를 줄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선우의 외형을 완성하는 과정도 치열했다. 주근깨를 찍고, 낯선 가발을 쓰고, 피부를 검게 칠하는 데만 매 회차 두 시간 가까운 분장 시간이 소요됐다.
"처음엔 거울 속 제 모습이 참 낯설었어요. 분장을 받는 두 시간 동안 딴짓하기보다는 거울을 멍하니 보면서 변해가는 제 얼굴을 계속 관찰했습니다. 어색함을 지우고 그 낯선 외형에 스스로 먼저 익숙해지고 편해져야 연기할 때 자연스러움이 묻어날 것 같았거든요. 렌즈를 착용한 거냐는 질문도 받았는데, 렌즈 없이 제 본래 눈빛으로 날 것의 감정을 담아내려 했습니다."

# 모두가 두려워해도 내겐 넘 안쓰러운 선우
선우는 친구를 살해하고 자신의 어두운 본질을 마주한 채 9년이라는 세월을 밑바닥에서 홀로 버텨낸 인물이다. 배현성은 선우가 지나온 시간을 이해하기 위해 연상호 감독과 끊임없이 대화를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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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를 해치고 나서 '아, 내 본질이 이렇구나'라는 걸 깨달은 뒤 9년 동안 밖에서 막 살았을 거라 생각했어요. 연쇄살인마라는 설정을 과하게 의식하기보다는, 사람을 해치고도 리어카를 아무렇지도 않게 끄는 무감각한 일상성을 보여주는 게 더 섬뜩할 거라 봤습니다. 감정이 아예 없는 사이코패스라기보다는, 감정을 철저히 억누르고 감추며 살아온 아이인 거죠."
그런 선우가 9년 만에 돌아와 마주한 현실은 자신을 대체하고 있는 'AI 아들'과 자신을 두려움과 경계의 눈빛으로 밀어내는 친엄마 류소영(김현주)이었다.
"선우 입장에서는 서운함과 질투가 클 수밖에 없었을 거예요. 돌아왔는데 엄마 옆엔 완벽한 AI 아들이 있고, 정작 피를 나눈 친아들은 차갑게 밀어내니까요. 연기하는 배현성의 입장에서도 선우가 참 짠하고 안쓰러웠습니다. 엄마가 건넨 오므라이스를 먹는 장면이 기억에 남아요. 갑자기 이제 와서 밥을 차려주고 '내 아들은 너 하나'라고 말할 때, 어이없으면서도 굳게 닫혀 있던 선우의 마음의 방문이 아주 조금은 삐걱거리며 열리지 않았을까 싶어요."
# 인생의 스승 김현주와 연상호 감독 만남
극 중에서는 숨 막히는 긴장감과 냉랭한 대립각을 세웠지만, 촬영 현장은 그 어느 때보다 따뜻하고 뜨거웠다. 특히 대선배 김현주와의 호흡은 배현성에게 엄청난 배움의 장이었다.
"김현주 선배님은 현장 분위기를 정말 밝고 유쾌하게 이끌어주세요. 슛이 들어가면 분노와 눈물, 복합적인 감정들을 눈빛과 온몸으로 쏟아내시는데, 그 감정이 제게 그대로 와닿으니까 저도 계산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리액션을 할 수 있었어요. 선우의 서늘한 감정을 끝까지 유지할 수 있었던 건 선배님이 끌어내 주신 에너지 덕분입니다. 너무 감사했죠."
연상호 감독 특유의 군더더기 없는 디렉션과 배우를 향한 신뢰 역시 그에게 큰 날개를 달아주었다. 초저예산 규모로 단 14회차(배현성 분량은 8회차) 만에 끝난 타이트한 일정이었지만, 현장은 조급함 대신 활기가 넘쳤다.
"감독님은 배우를 온전히 믿고 맡겨주세요. '믿고 한번 네 마음대로 해봐' 하시고, 오케이가 나면 유쾌하게 만족감을 표현해 주시니까 배우 입장에서는 더없이 큰 힘과 확신이 생기더라고요. 첫 촬영이 살인을 저지르고 엄마와 마주하는 아주 중요한 장면이라 긴장을 많이 했는데, '잘하려고 힘을 주면 오히려 망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대사만 완벽히 외운 채 현장의 공기와 상대 배우의 눈빛에 온전히 몸을 맡겼습니다.

#'실낙원'으로 첫 경험한 것들
첫 스크린 주연작으로 토론토 국제영화제와 부산국제영화제 레드카펫을 밟은 배현성은 "보는 눈이 한층 넓어졌다"며 벅찬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해외 영화제 현장에서 과거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를 기억하던 외신 기자들이 '실낙원' 속 그의 거친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던 순간은 잊지 못할 훈장이 됐다.
"영화를 보신 관객분들이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갈 때까지 배현성인 줄 몰랐다'고 말씀해 주실 때 가장 뿌듯하고 짜릿해요. 제 안의 또 다른 얼굴을 성공적으로 보여드렸다는 증거 같거든요. 악역에 도전하면서 대사 톤 하나하나에 고민도 많았지만, '왜 얘는 이런 행동을 했을까' 스스로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며 인물을 구축해 나가는 자유로움과 쾌감을 배웠습니다."
어느덧 데뷔 8년 차. "쉬지 않고 연기할 수 있어 하루하루가 행복하다"는 그는 차기작 로맨스 드라마 '여고생 황후'를 통해 또 한 번 전혀 다른 결의 색채를 덧칠할 준비를 마쳤다. 촬영장 밖의 삶은 어떨까?
"어머니에게 살가운 아들이냐고요? 네. 거의 하루에 한번 정도는 안부 연락을 하곤 해요. 제가 연기를 위해 서울에 올라온 후 많이 힘들어 하셔서 자주 연락을 드리려 노력해요. 여동생과는 자주 연락은 안하는데 용돈이 필요할 때는 연락이 오곤 해요. 쉴 때는 취미는 일본 소년만화를 보는 건 이외엔 별다른 게 없는 것 같아요.(웃음)"
소년의 순수를 지나, 악의 심연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자신만의 깊이를 획득한 배현성. 비극의 잔해 속에서 배우로서 완전히 새로운 눈을 뜬 그의 팔레트에는 이제 어떤 색을 얹어도 선명하게 빛날 단단함이 채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