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금융시장 불안이 장기화되면서 은행권에서 '한국은행 외환보유액을 활용해 달러 자금을 지원해 달라'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은행들이 달러 조달 금리가 올라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외환보유액을 쌓아놓고만 있기는 아깝다는 것이다.
외환보유액은 한 나라가 비상시 실탄으로 활용할 수 있는 대외 지급자산을 의미한다. 실제 지불능력이 있고 없고를 떠나 한 나라의 금융시장이 총체적 유동성 위기를 맞을 때, 중앙은행이 사태 해결을 위해 쓰는 것이 바로 이 외환보유액이다. 그래서 중앙은행을 최종대부자(lender of last resort)라고 칭한다. 각 기관이 아무리 비싼 돈을 줘도 자금 조달을 할 수 없을 때 나선다는 얘기다.
은행권의 논리는 기왕에 위기를 위해 쌓아놓은 자금이니 묶어두지 말고 미리 국내 은행을 좀 도와달라는 것이다. 가령 한은이 국내 은행들과 커미티드라인(비상시 달러공급을 사전 약속)을 계약하면 해외 신용도가 높아져 달려 조달비용을 낮출 수 있고 혹 조달을 하지 못해도 한은에서 빌리면 된다. 여기에는 현재 외환보유액(10월 말 기준 3110억 달러)이 충분하다는 판단도 작용했다.
그러나 지금이 과연 '위기이냐'는 문제가 있다. 지금은 아직 위기가 현실화되지 않은 상황인데다 닥쳐올 위기의 크기도 가늠하기 어렵다. 김중수 한은 총재가 "외환보유액은 보험과 비슷하기 때문에 평시의 기준에서 많다 적다를 논하기 어렵고, 지금같이 국제금융시장이 매우 불안정한 상황에서 중요성이 매우 크다"(지난 10월 통화정책방향 기자간담회)고 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더구나 이를 은행들에게 지원할 경우 위기 시 이를 바로 회수하지 못할 가능성이 커진다. 우리는 20여 년 전에 한은이 외환을 국내 은행들에 지원했다가 제 때 회수하지 못해 외환위기로 이어졌던 아픈 기억이 있다. (당시 외환보유액은 200억 달러를 넘었지만 실제 쓸 수 있는 것은 80억 달러가 안 됐다.)
만일 국제사회에서 은행에 대한 지원을 외환보유액 감소로 받아들일 경우 국가 전체 리스크가 높아진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에 따라 달러 조달비용이 올라간다면, 안 빌려 주니만 못한 결과가 초래될 수 있다.
은행들의 모럴헤저드 문제도 생각해볼 점이다. 중앙은행이 도와줄 것을 믿고 자구노력을 제대로 하지 않을 우려다. 위기에 빠진 대형은행을 세금으로 구해준 과거 전력을 생각하자면 또 다른 특혜가 추가되는 셈이다.
외환보유액은 전 국가적 위기에서 쓰자는 비상자금이다. 이를 외환보유액을 조달비용 측면에서 접근해서는 답이 나올 수 없다. "외환보유액의 진정한 성격을 이해하지 못한 것"(김중수 총재)이다. 외환보유액은 절대 '기스'가 나서는 안 되는 자산이다. 사실 한은을 무자본 특수법인으로 두고 독립성을 보장한 것도 그런 의미에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