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라이프, 꿈과 현실 사이]

평균 수명 100세 시대, 은퇴 후 삶은 만인의 관심사다. 4~5년 전 동남아시아 국가에서 성공적으로 자리잡은 은퇴자들이 방송을 통해 소개되면서 '은퇴이민'도 인기를 모았다. 당시 소위 '묻지마 은퇴이민'이 늘면서 실패 소식도 빈번하게 들린다.
작은 은퇴자금으로 귀족처럼 살 수 있다고 알려진 은퇴이민, 어디까지 진실인걸까. 은퇴 이민지로 자주 거론되는 필리핀 현지에서 필리핀 정부 책임자와 현지 교민들의 진실을 찾아봤다.
◇"따뜻한(warm) 나라 필리핀을 소개합니다"
"따뜻한 날씨만큼 따뜻한 사람들이 있는 곳입니다. 언제나 환영합니다."
지난달 16일 필리핀 현지에서 만난 베르디그노 아티엔자(Veredigno P. Atienza) 은퇴청 총괄 책임자(General Manager of Phillippine Retirement Authority, PRA)의 말이다. 은퇴이민을 고려하는 한국인에게 한 마디를 부탁했더니 "오세요. 환영합니다(Come, Welcome)"라며 말문을 열었다.
아티엔자 총괄 책임자는 필리핀을 아름다운 비치가 많은 따뜻한 나라로 소개했다. 시간이 여유로운 은퇴자들이 한적하게 지내기에 안성맞춤이라는 설명이다.
필리핀은 지난 1987년부터 은퇴청을 설립해 은퇴이민을 적극적으로 받기 시작했다. 아티엔자 총괄 책임자는 "무너지는 경제로 줄어드는 외환보유고를 키워보자는 의도였다"고 설명했다. 필리핀 정부는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보다도 적극적으로 은퇴 이민자 유치에 나섰다.
지난 25년여간 특별 영주 은퇴비자(Special Resident Retiree's Visa, SRRV)를 발급받은 외국인 수는 1만5447여명이다. 이들이 동반한 배우자나 자녀를 포함하면 3만여명이 넘는다.
한국 국적자(6681명)는 그 중 두번째로 많다. 이밖에도 상위 4개국은 모두 아시아 국가다. 1위가 중국인(9275명)이고 대만인(3756명), 일본인(2619명) 등이 뒤를 잇는다.
◇은퇴자를 위한 비자인 SRRV 종류만 네가지…

SRRV는 비이민 복수 입국 비자다. 해당 비자가 있으면 출입국이 자유롭고 필리핀에서 영구 거주권을 인정받는다. 필리핀 대사관이 발급한 입국비자를 소지한 모든 외국인은 신청이 가능하다. 다만 범죄경력, 전염성 질환 여부를 확인해 제한을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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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용은 크게 두 가지다. 일단 단순 신청비용으로 주 신청자가 미화 1400달러를 내야한다. 함께 신청할 배우자나 부양가족(21세 미만 미혼자녀)이 있다면 1인당 300달러를 추가 지급해야한다.
또 다른 비용은 예치금이다. 필리핀 정부가 지정한 은행을 통해 필리핀 개발은행으로 일정부분 예금을 넣어야하는 것. 한국계 은행으로는 외환은행, 동양상호저축은행이 도맡아해왔다.
SRRV는 네 가지 종류로 나뉜다. 가장 일반적인 프로그램 두 가지(Classic/Smile)는 35세 이상이면 신청가능하다. 예치금을 투자명목으로 활용할 수 있는지에 따라 비자 유형이 다르다. 나이(50세 이상)와 연금 여부 등에 따라 예치금 규모는 미화 1만 달러, 2만 달러, 5만 달러로 나뉜다.
이밖에 요양을 위해 오는 신청자들을 위한 비자(Human Touch), 공직자 혹은 유명인등을 대상으로 일종의 예우(Courtesy) 비자 프로그램도 운영된다.
아티엔자 필리핀 은퇴청 총괄 책임자는 "가장 기본적인 형태인 클래식, 스마일 비자를 통해 들어오는 수가 가장 많다"며 "예치금으로 필리핀 현지에 투자하려면 클래식 비자를 발급받으면 된다"고 설명했다.
◇한국인에게 가장 인기있는 지역은, 역시 수도 마닐라
은퇴이민을 온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사는 곳은 어디일까.
필리핀 은퇴청에 따르면 4월말 현재 수도 마닐라에 SRRV 비자를 소지한 한국인 812명이 살고 있다. 필리핀 전역에서 가장 인기 높은 도시다.
또 필리핀의 경기도로 설명할 수 있는 벵구엣 지역(133명)과 밤방가 지역(121명)도 인기다. 밤방가는 글로리아 아로요 전 필리핀 대통령의 출신지로 임기 당시 개발이 상당히 많이 이루어진 곳이기도 하다.
이밖에도 SRRV 비자를 소지한 한국인들은 카비테(161명), 리잘(112명), 휴양지로 잘 알려진 세부(95명), 다바오(69명) 등에 주로 살고 있다.

은퇴청의 한국인 현황 자료를 보면 인기지역 외에도 눈에 띄는 점이 하나 더 있다. '총 수'와 '순(純) 수'가 다르다는 점. SRRV 비자를 가진 한국인(주 신청자 가족 제외) 총 수가 2765명인데 순 수는 1772명에 그친다.
아티엔자 총괄 책임자는 1000명의 행방에 대해 "미싱(missing)"이라고 말한다. '실종'이라기보다는 필리핀에 없다는 의미였다. 잠시 한국 등 다른 나라에 나간 경우이거나 취소절차를 밟고 아예 떠나버린 사람들인 것.
이 수치를 뒤집어 생각하면 은퇴이민을 결심했다가 되돌아간 수가 그만큼 많다고 풀이할 수도 있다.
실제 SRRV 전체 취소자 수는 4338명(주 신청자 가족 제외)으로 전체 등록자수의 28%에 이른다. 올해 1~4월 사이 SRRV 총 등록자 수(1114명)가 전년보다 26.3%가 늘어났는데 동시에 취소자 수(216명)도 20.67%가 증가했다. 이유야 다양하겠지만 낮지 않은 취소율이다.
◇필리핀 정말 천국인가요? "○○○ 나름"
높은 취소율에도 은퇴청에서는 성공적인 은퇴이민에 대한 조언이나 우려점 등을 듣기는 힘들었다.
예를 들어 의료서비스에 대해 묻자 은퇴청은 "필리핀 의료시설은 아시아 최고"라는 대답만 내놓았다. 의료비가 비싸서 은퇴이민을 왔다가 한국으로 돌아가는 경우도 많다는 교포들의 이야기와는 상반된 답이다.
객관적인 수치가 아닌 솔직한 은퇴이민 현실을 말해줄만한 사람들을 만났다. 은퇴비자 예치금 업무 협력 한국계 은행 관계자들이다. 개인의 경험보다는 타인으로서 수많은 은퇴이민자들을 바라본 '인간 빅데이터'들인 셈.
이들이 꼽은 필리핀 은퇴이민에 대한 가장 큰 오해는 바로 '월 200만원이면 귀족처럼 지낼 수 있다'였다.
필리핀 물가가 무조건 싸다고 생각하면 큰 코 다친다. 제조업 공장이 없기 때문에 웬만한 공산품은 모두 수입해서 쓰는 나라가 필리핀이다. 물 건너 온 만큼 가격도 저렴하지 않다. 특히 전기세는 상상을 초월한다. 더운 날씨에 에어컨을 애용하다보면 한 달 전기세가 30만원을 넘기기는 쉽다. 평균 물가를 감안하면 놀라운 액수다.
물론 인건비는 우리나라의 10분의1 수준이다. 운전기사와 가정부를 고용할 수는 있지만(가정부의 경우 한 달 인건비가 우리 돈으로 평균 20~30만원이다) '총 생활비 월 200만원'은 환상이란 것.
투자 조언으로는 '땅은 살 수 없다'는 것을 먼저 꼽았다. 필리핀 현행법상 외국인이나 해외 자본이 지분 100%를 가진 법인 등을 토지를 매입할 수 없다. 이런 점이 건설업 등을 할 때는 불안 요소로 작용하는 것. 연립주택이나 콘도미디엄 등을 매입할 때도 이런 점들을 유의해서 매물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이밖에도 꼭 한 번 생각해봐야할 점들이 있다. 바로 의료, 언어, 음식, 치안. 이 가운데서도 특히 의료서비스 부분은 고연령자들이 주로 은퇴 이민을 오는 만큼 확실히 챙겨봐야한다. 필리핀에는 분명 의료 관광을 올만한 의료서비스를 갖춘 병원이 있지만 국내에서처럼 보험 처리가 안되기 때문에 비싸다.
치안문제도 있다. 총기소지한 경우도 많기 때문에 본인의 치안을 지키기 위한 비용이 추가로 들 것이란 설명이다. 실제 마닐라 시내 고급주택가에서는 사설 경비원들을 쉽게 만날 수 있었다.
마지막 조언은 '적어도 3개월은 미리 살아봐라'다. 은퇴이민을 결정하기 전 대부분 사람들은 현장답사를 한다. 그 정도 노력은 모두 기울이는 것. 하지만 그 기간이 터무니없이 짧다는 것이 문제다. 1, 2주일로는 체험할 수가 없다. 은퇴이민 3개월 안에 예치금을 빼가는 경우도 빈번하다고 관계자들은 전했다.
성공 여부는 본인이 준비하기 나름이라며 '철저한 준비'를 준비했다. 이민은 '여행'이 아닌 '생활'이다. 진지하게 고민 중이라면 먼저 살아보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조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