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정치의 미래' 재선의원을 말한다
이른바 '대선주자급' '거물급' 정치인보다는 상대적으로 대중에게 덜 알려져 있지만 국회를 움직이는 실질적인 힘은 재선의원들에게 있다. 초선의원을 넘어, 다선 중진으로 가는 길목, 정치적인 역량을 갖추고, 지역기반도 안정, 원내/외부 양면에서 자기 정치를 본격화하는 여야 재선 의원들을 조명함으로써 한국 정치의 미래를 가늠해본다.
이른바 '대선주자급' '거물급' 정치인보다는 상대적으로 대중에게 덜 알려져 있지만 국회를 움직이는 실질적인 힘은 재선의원들에게 있다. 초선의원을 넘어, 다선 중진으로 가는 길목, 정치적인 역량을 갖추고, 지역기반도 안정, 원내/외부 양면에서 자기 정치를 본격화하는 여야 재선 의원들을 조명함으로써 한국 정치의 미래를 가늠해본다.
총 30 건
중·고등학교 때부터 '조선왕조실록 500년사', '일성록(日省錄·국왕의 동정과 일지를 기록한 역사기록)' 등을 읽으며 역사학자를 꿈꾸던 소년이 있었다. 이 소년은 1977년 서울대 국사학과에 진학해 원하던 역사 공부를 맘껏 할 수 있다는 꿈에 부풀었다. 하지만 시대는 소년의 꿈을 오래가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그는 대학 1학년 때 수업을 들으러 가던 도중 잘 알고 지내던 선배가 교정에서 '유신독재 반대' 구호를 외치다 경찰들에 끌려가는 모습을 목격했다. 많은 학생들이 선배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지만 아무도 그를 보호하지 못했다. 유기홍 민주당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간사(서울 관악갑)는 아직도 그 장면이 눈 앞에 선하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무력감이 그를 사로 잡았고 인생 진로를 송두리째 바꾸는 계기로 작용하게 됐다. 유 의원은 그 길로 반(反)독재 투쟁에 나섰다. 그는 이후 시위와 투옥을 반복했고, 1981년 고(故) 김근태 의원과 인연을 맺게 돼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활동
국회 본회의장엔 대형 전광판이 두개 있다. 전자표결시 찬성이면 녹색, 기권이면 노랑, 반대면 빨강 불빛이 해당 의원 이름 앞에 표시된다. 2011년 11월22일 세상을 '들었다 놨다' 했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안 국회 본회의 표결. 황영철 새누리당(당시 한나라당) 의원 이름에 빨간불이 들어왔다. 장내가 술렁였다. 한미 FTA를 지지한 여당 내 유일한 반대표였다. 야당이 표결에 불참하면서 그야말로 '나홀로' 반대. 게다가 그는 당 원내대변인이었다. "그래도 서 너 명은 반대하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그런데 저 혼자…. 곤혹스러웠지만, 오히려 지역에선 의미 있게 받아들여주셨어요." 황 의원이 정치를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 중 하나다. 그는 올해 만 48세이지만 정치경력은 23년째다. 1991년 지방자치 부활 원년에 고향인 강원도 홍천에서 군의원(기초의원)으로 시작했다. 대학을 갓 졸업한 25살 청년 시절이다. 이후 광역의원(강원도의원), 정당 원외 지역위원장을 거쳤다.
# 지난 2일 서울지역 국회의원 등 50여명의 새누리당 인사들이 잇따른 안전사고와 관련해 서울시청을 항의 방문했다. 박원순 서울시장에게 대립각을 세워온 김성태 의원이 선봉에 섰다. 김 의원은 항의 방문 후에는 서울광장에 마련된 민주당 천막 당사 쪽으로 이동해 장외 투쟁 중인 민주당 인사들을 위로했다. 야권 유력 주자와의 한판 승부를 마다않는 투쟁력, 장외로 나간 야당 인사들을 감싸 안을 줄 아는 유연함. 상반돼 보이는 이 두 이미지에 김 의원의 진면목이 담겨있다. 목표가 생기면 저돌적으로 밀어부치지만, 때로는 뜻이 달라도 함께 가야한다며 '상생의 정치'를 말하는 사람, 그가 바로 '정치인 김성태'다. ◇열사의 땅에서 정치를 보다 = 김 의원은 1980년대 초 중동 사우디 건설 현장에서 근무했을 당시 잘못된 기업 경영으로 일자리를 잃는 노동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노동운동에 투신했다. 이후 한국노총 사무총장, 상임부위원장을 역임하며 노동 운동가로 이름을 날리던 그는 18대 총선을 통해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사는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될까. 그것도 어릴 적 부터 꿈꿔오던 일이라면. 무엇보다 본인에게 행복한 일이겠지만 우리 사회로 봐서도 좋은 일이다. 좋아서, 열정적으로 일을 하다 보면 능률이 오르고 그런 사람이 많아지면 우리 사회 전체의 생산성과 행복지수도 따라서 올라간다. 정치권에서는 새누리당 김희정 의원이 그런 사람이다. 어렸을 때부터 정치를 하고 싶었고, 지금도 정치를 하는 게 좋다고 한다. 정치인으로서 자신의 장점이 '정치를 좋아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 '정치인 김희정'의 이야기는 바로 이 '열정'에서 시작된다. ◇부산지법 재판장을 찾아간 여중생 "중학교 때 재판 현장이 궁금해서 친구들과 함께 부산지법에 간 적이 있어요. 판사가 눈을 똥그랗게 뜨고 저를 쳐다보더라구요." 김 의원은 어렸을 때 친구들과 함께 법원이나 유세 현장 등을 다녔다. 막연하게나마 '나랏일'이라는 것을 경험해보고 싶어서였다. 그에게 나랏일은 '정의로운 일'. 만화영화 속 '로
'비저너리(visionary)'와 '그레이트 커뮤니케이터(Great Communicator)'를 꿈꾸는 정치인이 있다. 정치인이라면 무릇 국가가 나아갈 비전을 제시할 줄 알아야 하며 소통의 달인이 돼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민주당 최고 기획통이자 전략가로 손꼽히는 민병두 민주당 전략홍보본부장(서울 동대문을)이다. 민 의원은 1970~80년대 엄중한 시기 군사독재투쟁과 민주화의 최전선에서 활약했고 이후 기자로 변신해 빼어난 통찰력과 필력으로 이름을 날렸다. 도올 김용옥 선생이 민 의원의 칼럼을 좋아해 '대필대애(大筆大愛)'라 평가했을 정도다. 국회 국정감사에 대한 시민단체의 감사를 이끌어낸 것도 민 의원이 기자시절 가져온 대표적 변화다. 민 의원은 "정치권에서 '비저너리'와 '그레이트 커뮤니케이터'가 많이 나와 세상을 바꿔야 한다"는 지론을 갖고 있다. "현대는 지도자가 10년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국가 위상과 경제력이 확확 바뀐다. 중국이 변방의 덩치 큰 국가에서 'G2'로 떠오르
"우리는 악행에 침묵하는 말없는 증인들이었습니다." 히틀러 정권에 대항하다 투옥된 독일의 신학자이자 목사인 디트리트 본회퍼의 '옥중서간'의 일부다. 나치정권에 끝까지 맞섰던 본회퍼는 결국 39세(1945년)때 처형돼 짧은 생애를 마친다. 본회퍼의 삶은 한때 피아니스트를 꿈꾸던 한 여학생의 삶을 송두리째 변화시켰다. 가녀린 여학생은 본회퍼의 '옥중서간'을 읽으면서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할지 고민했다. 그리고 실천하는 삶을 살겠다고 다짐하면서 사회활동가로 변신한다. 이 소녀가 바로 민주당 유승희 의원(서울 성북갑)이다. 유 의원은 대학 졸업후 10년간 구로공단 산돌노동문화원 총무로 노동자들의 권익향상을 위한 활동을 펼쳤다. 이후 여성단체 추천으로 광명시 시의원과 새천년민주당의 최초공채출신 여성국 국장을 거쳐 재선 국회의원에 이르기까지 변신을 거듭했다. ◇베풂이 진정한 여성리더십=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안정적 지위를 갖춘 여성들일수록 베풀 줄 알아야 한다. 성공한 여성들도 많지만 어려움을
지난달 22일 국회에서는 계엄법 개정안이 발의돼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법안 발의자는 김재원 새누리당 의원(경북 군위·의성·청송). 담뱃값 인상법 등 폭발력이 큰 법안을 주로 발의, 늘 논란의 중심에 섰던 그가 다시 민감 법안을 내민 것이다. 김 의원을 만난 것은 바로 다음날이다. 그는 '뜬금없다'는 주변 반응을 이해한다면서도 자신의 철학을 분명하게 제시했다. "후대에 해악을 넘겨주지 않으려면 지금부터 문제를 인식하고 손을 대야 해요. 그게 정치의 역할이고. 비를 맞지 않으려면 맑은 날 우산을 준비해야죠." ◆계엄법·담뱃값…'뜬금법' 전문?= 계엄법 개정안은 계엄기간을 6개월로 한정하되 필요한 경우 연장하도록 했다. 계엄해제 이후엔 군사법원이 재판을 할 수 없도록 했다. 젊은 세대에게 '계엄'의 뜻조차 생소할 만큼 사문화된 법안인데 왜 고치자는 걸까. 그는 "로마시대에도 독재관 임기를 6개월로 했는데 우리는 계엄의 기한이 없다"며 "우리나라에 계엄이 선포되고 한 번도 정상적으로 평시
여여 협상의 최일선이자 원내 정치의 꽃으로 불리는 원내수석부대표, 제1 야당의 최고위원. 정치인이라면 누구나 욕심을 낼만한 자리다. 중진의원도 한번 해보기 힘든 두 자리를 재선 의원으로 이미 다 경험하고 있는 이가 있다. 민주당 우원식 최고위원. 누가 봐도 엘리트 정치인인 그의 관심은 오롯이 '을(乙)'이다. 지난 5월, 전국을 '갑을 논란'에 빠뜨렸던 이른바 '남양유업 사태' 이후 '을 살리기'에 나선 민주당의 을지로위원회(을을 지키는 길 위원회) 위원장이 그다. 야당의 잘 나가는 정치인, 그가 그토록 '을'을 부르짖는 이유는 무얼까. ◇민주주의는 바로 '민생' = "대학 1학년 때에요. 써클에서 여름에는 농활을, 겨울에는 도시빈민공사를 갔어요. '사람들이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데 왜 이렇게 못 살까' 그게 제 출발이었어요. 정부가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재벌들과 결탁을 하고, 아무리 일해도 어려운 사람들이 생겨나고, 그래서 이것은 독재 권력의 문제다. 그렇게 생각해서 반독재 운동
MB(이명박)의 남자, 친이(親李) 직계. 조해진 새누리당 의원(경남 밀양·창녕) 하면 떠오르는 말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퇴임했지만 이 수식어는 아직도 그를 따라다닌다. 지금은 박근혜 대통령의 시대, 이제는 '친이'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을까. 지난 24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마주앉은 조 의원 대답은 예상대로였지만, 그래서 더 뜻밖이었다. "이 전 대통령과는 인생 최고의 인연이에요. 남들의 시선, 정치상황에 따라 바뀔 수도 있지만 설령 그런 부담이 있다 해도 그보다 몇 배로 자랑스러운 인연입니다." ◆가시밭길 참모인생.. MB와 '감격시대' 서울대 법대 82학번인 그는 1992년 박찬종 의원(14대국회) 비서로 정치에 발을 들인다. 그러나 2008년 18대 총선에서 배지를 달기까지 16년을 누군가의 '참모'로 살았다. 그 대부분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박찬종 의원은 서울시장 선거와 신한국당 대선후보 경선에 연거푸 실패하며 정치에서 은퇴한다. 조 의원은 시대를 뒤흔든 정치인의 핵심참모에
"흙오이 사건을 기억하십니까?" 2002년 16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후보는 새벽 재래시장을 방문해 시장상인들과 김치찌개에 소주잔을 기울이고, 흙 묻은 오이를 씻지 않고 그냥 먹는 등 서민행보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 때 상대당인 민주당의 여성 부대변인의 일침에 이 후보는 치명타를 입게 된다. 이 여성 부대변인은 이 후보가 씻지 않은 흙오이를 먹은 것에 대해 "진짜 서민들은 오이를 씻어 먹는다"고 일침을 가한다. 욕 얻어먹기 좋은 대변인과 부대변인 자리에서 7년을 버티며 민주당의 '입'역할을 해온 여성 재선 의원, 바로 김현미 민주당 의원 얘기다. 당과 정부에서 대언론창구 역할을 해온 그의 입에서 나오는 '거리낌'없는 직설적 발언들은 당시 상대당의 등골을 오싹하게 하기 충분했다. ◇DJ와 평화민주당…소녀, 정치를 시작하다 김 의원은 전북 정읍에서도 한참을 더 들어가야 하는 깡촌(?)마을 신태인에서 1남7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연세대로 진학한 그는
'교수 출신 국회의원, 우파 경제학자, 정책전문가' 나성린 새누리당 정책위 부의장 하면 떠오르는 단어들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국회의원 '나성린'을 설명하려 한다면 오산이다. 비례대표 의원에서 지역구 의원으로 가장 성공적으로 변신한 정치인, 점잖 빼지 않고 지역 주민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아저씨, 누구보다 지역구 관리를 철저히 하는 의원도 '나성린'이다. 이런 상반된 면모가 산전수전 다 겪은 고수들로 우글거리는 한국 정치판에서 나 의원이 온전히 자신의 입지를 다져가고 있는 저력이다. ◇"전략가 보다는 정책전문가로 남고 싶어" 통상 힘 있는 정치를 하고 싶은 국회의원들은 '정책통' 보다는 정무적인 판단이 능한 '전략가'가 되고 싶어 한다. 그럼에도 나 의원은 정책국회를 만드는데 기여하고 싶다고 했다. '전략'이라는 말에는 손사래를 쳤다. "저는 정책정치, 정책국회 만들려고 국회에 들어왔어요. 시대정신을 제시하는 '이데올로그(ideologues·이론적 지도자)'가 되고 싶습니다. 이명
무학여중·고와 신탁은행 시절 유명한 농구선수에서 은행원으로, 다시 노조원, 여성 최초 금융노조 상임 부위원장으로, 그리고 여성 정치인이자 실물 경제전문가로 극적인 변신을 거듭한 여장부가 있다. 국회 정무위원회 민주당 간사를 맡고 있는 '친절한 영주씨' 김영주 의원(서울 영등포갑)이다. 그를 '변신의 여제'로 만든 건 8, 9할이 '승부사적 기질'이다. 김 의원은 "운동선수 출신으로 쌓은 승부기질에다 한번 시작하면 끝까지 파고 드는 끊임없는 노력이 변신의 원동으로 작용했다"고 말했다. ◇농구선수, 은행원·경제전문가가 되다 김 의원이 농구를 시작한 것은 남들보다 늦은 무학여중 2학년때였다. 큰 키와 발군의 운동실력이 감독 눈에 들었다. 농구선수로 재능을 보인 김 의원은 좁은 관문을 뚫고 1973년 실업 명문 신탁은행으로 입단했지만 체력적 한계로 3년만에 은퇴하게 된다. 그리고 시작한 신탁은행 약수동 지점에서의 은행원 생활. 김 의원은 '차별'이란 또 다른 장벽에 직면해야 했다. 지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