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무슨일이?
과거 오늘, 우리 사회와 세계에서 일어난 다양한 역사적 사건과 인물, 문화, 정치적 변화를 되짚어봅니다. 잊혀진 이야기부터 잘 알려진 순간까지, 오늘의 역사가 전하는 의미를 함께 생각해보세요.
과거 오늘, 우리 사회와 세계에서 일어난 다양한 역사적 사건과 인물, 문화, 정치적 변화를 되짚어봅니다. 잊혀진 이야기부터 잘 알려진 순간까지, 오늘의 역사가 전하는 의미를 함께 생각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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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2월1일.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 황실의 안녕과 평화를 유지한다는 명분으로 서울에 조선통감부를 설치했다. 사실상 한국을 속국으로 만들기 위해 '고문 정치'에 돌입한 것이다. 1904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을 독자적으로 간섭할 수 있게 되자 침략 의지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그 결과 1905년 을사조약을 체결, 서울에 통감부를 설치하고 통감은 오로지 외교에 관한 사항을 관리하는 권한을 가지도록 했다. 하지만 통감부는 외교 뿐 아니라 행정·금융·종교·교육 등 국정 전반을 지휘·감독하면서 한국의 통치 조직을 해체하는 역할을 했다. 초대 통감은 이토 히로부미다. 설립 후 한달은 하세가와 요시미시가 임시통감을 맡았고 이토는 3월2일부터 정식 취임했다. 통감은 일본 천황에 직속한 관리로 규정했는데 이는 한국을 천황의 통치권 안에 있는 지역으로 간주한 것이었다. 통감은 행정 전반에 대한 집행을 한국 정부에 요구할 수 있었다. 집행 후 한국 정부에 일방적으로 통보할 수도 있어
1990년대 X세대 문화와 대중가요계를 이끌던 음악그룹 '서태지와 아이들'이 20년전인 1996년 1월31일 은퇴를 선언했다. 잠적 10여일 후 갑작스런 발표였다. 서태지와 아이들 멤버인 서태지, 양현석, 이주노는 이날 서울 명륜동 성균관대 유림회관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가요계 활동을 마감하고 대한민국의 평범한 청년으로 돌아가겠다"고 밝혔다. 발표한 앨범마다 가요계의 역사를 새로 쓰며 최절정기를 누리던 시기에 나온 은퇴 선언인 탓에 현장은 눈물바다를 이뤘다. 그룹 '시나위'에서 베이시스트로 활동하던 서태지는 시나위 해체 후 1992년 1월 양현석과 이주노를 만나 '서태지와 아이들'을 결성한다. 그들은 곧 빠른 템포와 랩이 가미된 댄스곡 '난 알아요' 등이 수록된 1집 'Yo! Taiji'를 발표했다. 랩은 당시 한국 대중가요에선 생소한 발성이어서 평론가들에게 호평을 받지 못했지만 대중들은 반응은 정반대였다. 청소년들은 부드럽고 서정적인 발라드 대신 빠른 템포의 리듬과 거침없이 내뱉
"나는 인도의 한 시민으로서, 양심을 존중하는 한 사람으로서 이 나라를 위해 정의를 행하고자 한다. 이 신념 때문에 처벌된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중죄인이 될 명예를 얻고자 한다. 이 세상에서 인정하는 유일한 독재자는 내 속에 있는 양심이다." 비폭력 무저항주의로 상징되는 인도 건국의 아버지 마하트마 간디가 1948년 1월30일 뉴델리 거리에서 힌두교 광신자 나투람 고두세의 총탄을 맞고 쓰러졌다. 1년 전 인도·파키스탄 분할 독립으로 인해 힌두교와 이슬람 신도간의 대립이 격화되자 소요를 진정시키기 위해 벵갈과 뉴델리를 방문하던 중에 당한 참변이었다. 1869년 인도 서부 포르반다르에서 태어난 간디의 본명은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다. '위대한 영혼'이라는 뜻의 '마하트마'는 인도의 문호 타고르가 붙여준 것이다. 평범한 생활을 하던 간디는 1887년 영국으로 유학해 법률을 공부했고 귀국 후 변호사로 활동했다. 1893년 소송 사건을 의뢰받아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으로 향했는데 남아공에
130년 전인 1886년 1월 29일, 칼 벤츠가 자신이 개발한 '가스-동력 차량'에 대한 특허를 신청하며 자동차가 탄생했다. 같은 해 고틀립 다임러가 모터 구동식 마차를 개발했다. 이처럼 1886년에 메르세데스-벤츠의 130년 성공 스토리가 시작됐다. 29일 메르세데스-벤츠에 따르면 1886년 1월 29일 만하임 출신 엔지니어 칼 벤츠는 베를린의 독일 임페리얼 특허 사무소에 자신이 개발한 '가스-동력 차량'에 대한 특허 신청을 냈다. 이 문서의 번호는 DRP 37435로 자동차의 탄생을 상징한다. 130년 역사의 이 문서는 칼 벤츠의 혁신적인 정신, 창의력, 그리고 기업가 정신을 보여주고 있다. 이 문서는 2011년 쿠텐베르크 성경. 마그나 카르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미사곡 B단조 등을 포함해 잘 알려진 유네스코의 세계유산기록 중 하나로 선정되기도 했다. 칼 벤츠는 세계 최초의 자동차를 1885년에 개발했다. 이를 위해 그는 특별히 설계된 섀시에 가로로 고속 1-실린더 4-스
"예술이란 원래 반은 사기입니다. 속이고 속는 것이지요. 사기 중에서도 고등 사기입니다. 대중을 얼떨떨하게 만드는 것이 예술입니다. 엉터리와 진짜는 누구에 의해서도 구별되죠." 비디오 예술의 창시자, 전위음악가, 행위예술가, 테크놀로지 사상가 등 수많은 수식어가 이름 앞에 붙는 예술인이 2006년 1월29일 세상을 떠났다. 평생 기행과 기존 예술에 대한 파괴·재창조를 거듭하며 세계적인 명성을 떨친 이 사람은 바로 백남준이다. 백남준은 1932년 서울 종로구 서린동에서 태창방직을 경영하던 섬유업계의 대부 백낙승씨의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독일 뮌헨 루트비히 막시밀리안대학에서 공부한 뒤 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 예술활동을 시작한다. 1963년 독일에서 첫 개인전을 열어 비디오 예술의 창시자로 세계 미술계의 주목을 받은 그가 국내에 처음 소개된 것은 1980년대 초반. 1984년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국내에서 그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굿모닝
1986년 1월28일 오전 11시38분, 승무원 7명을 태운 미국 우주왕복선 챌린저호는 플로리다 케이프 커내버럴 기지에서 불꽃을 뿜으며 솟구쳐올랐다. 챌린저호의 열 번째 임무였다. 하지만 환호가 탄식과 경악으로 바뀐 데 걸린 시간은 고작 73초였다. 챌린저호는 발사 73초 후 거대한 폭발에 이어 연기를 내면서 산산조각이 났다. 17년 뒤 우주왕복선 컬럼비아호가 공중분해되는 일이 벌어지기 전까지 '미국 우주계획 역사상 최악의 사고'였다. 챌린저호 사고의 결정적 원인은 O링 때문으로 밝혀졌다. O링은 일종의 고무링으로 부스터 두 아랫부분 사이의 이음매를 밀봉해 주는 역할을 하는데 발사 당시 추운 날씨 탓에 O링이 얼어붙으며 가스가 누출돼 불이 붙은 것. 발사 전 부품 담당자들이 '날씨가 추우면 고무 O링이 제구실을 할 수 없게 된다'며 발사 연기를 요청했지만 미국 항공우주국(NASA) 측은 이를 '수용 가능한 위험'으로 보고 연기 요청을 무시했던 것으로 특별조사위원회에 의해 밝혀지게
'천재성만큼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지식만큼 천재성을 가지고 있는 유일한 음악가.' 오페라 '세비야의 이발사'를 단 13일만에 만든 19세기 이탈리아 천재 작곡가 조아키노 로시니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를 표현한 말이다. 1756년 1월27일,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는 신성로마제국(현재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났다. 아마데우스는 '신의 은총'이란 뜻으로 이름 그대로 그는 짧은 삶 동안 신으로부터 받은 선물이라고 생각될 정도의 천재성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모차르트는 네 살 때부터 피아노를 치기 시작해 다섯 살이 채 되기 전에 미뉴에트와 트리오를 30분만에 다 익힘은 물론 작곡도 할 수 있게 됐다. 그의 아버지 요한 게오르크 레오폴트 모차르트도 당시 꽤나 알려진 궁정음악가였는데, 막내아들인 볼프강의 재능을 극대화하기 위해 세심한 교육 프로그램을 짜고 그것을 실천했다. 특히 아들의 재능을 각지의 궁정에 알리고자 모차르트가 6살이 되자 유럽 각지로 연주 여행을 시작했다. 연주
‘홀로코스트 이후에도 서정시가 가능한가.’ 철학자 테오도르 아도르노는 홀로코스트를 두고 더는 서정시를 쓸 수 없을 만큼 잔혹한 사건이라고 표현한다. 홀로코스트는 역사상 가장 계획적이고 조직적이면서 잔인한 대량학살이다. 홀로코스트로 유대인을 비롯해 슬라브족, 집시, 동성애자, 장애인 등 무려 1100만명의 민간인과 전쟁포로가 학살당했다. 1945년 1월27일은 대표적 홀로코스트 시설인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해방된 날이다. 해방을 기념해 2004년부터 이날을 ‘홀로코스트 희생자 추모일(Holocaust Remembrance Day)’로 지정했다. 이스라엘에선 이날 오전 10시 사이렌이 울리면 고인을 추모하는 묵념을 한다. 2차 세계대전 기간동안 히틀러와 나치스가 홀로코스트로 학살한 사람 가운데 유대인은 600만명. 이는 당시 유럽 거주 유대인 900만명 중 3분의 2에 해당된다. 여자 200만명과 어린이 100만명도 포함돼 있었다. 더 끔찍한 것은 이러한 박해와 학살이 국가에 의해서 단
2001년 1월26일 오후 7시15분, 도쿄 신주쿠(新宿)구 JR 신오쿠보(新大久保)역. "선로에 사람이 떨어졌어요"라는 다급한 외침이 울려 퍼졌다. 선로에는 한 취객이 떨어져 있었고 역에 있던 많은 사람들은 발만 동동구르며 바라만 보고 있었다. 역 근처 PC방에서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기숙사로 돌아가던 유학생 이수현씨(당시 26세)는 선로에 사람이 떨어진 걸 보고 주저없이 뛰어들었다. 이씨 혼자 취객을 선로 밖으로 끌어내려 애쓰던 그때 역으로 들어서는 전철의 불빛이 보였다. 열차는 점점 더 이씨와 취객 가까이로 다가왔고 이를 보다 못한 일본인 사진가 한 명이 이씨를 도우려 선로로 뛰어들었으나 이들 3명은 모두 전철에 치여 그 자리에서 숨졌다. 1974년 부산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 무역학과에 입학한 뒤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 이씨는 15년 전인 2001년 1월26일 도쿄 신주쿠구 JR 신오쿠보역에서 이렇게 젊디 젊은 인생을 마쳤다. 당시 이씨 빈소에는 일본 주요 정치인을 비롯한 추모객
원조 '밤의 대통령'. 미국 금주법시대 시카고를 주름잡던 폭력조직 두목이 있었다. 전설적 대부 '알 카포네'다. 수많은 폭력·살인사건을 배후에서 지휘하던 알 카포네는 69년 전인 1947년 1월25일 숨졌다. 본명은 알폰소 가브리엘 카포네(Alphonse Gabriel Capone). 1899년 뉴욕 빈민가에서 태어난 알 카포네는 소년 시절부터 '파이브 포인츠(Five points) 갱단'에 들어가 범죄를 접하며 자랐다. 이후 알 카포네는 1920년 21세의 나이로 시카고로 활동 무대를 옮겨 밀주·밀수·매음·도박 등의 사업을 벌였다. 알코올의 제조·운반·판매를 금지하는 미국의 금주법을 보란 듯이 무시하는 사업이었다. 밀주사업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하면서 알 카포네는 이탈리아계 마피아의 두목 자리를 차지했다. 1929년에는 '성 발렌타인 데이 대학살' 등 각종 폭력과 살인사건을 배후에서 지휘했고 급기야 1930년에는 시카고 트리뷴에 '공공의 적(Public enemy)' 명단 1위에
"나를 먹여 살리느라 너는 늘 가난하게 지냈겠지. 네가 보내준 돈은 꼭 갚겠다. 안 되면 내 영혼을 주겠다." 서양 미술사상 가장 위대한 화가로 꼽히는 빈센트 반 고흐가 1889년 1월28일 동생 테오 반 고흐에게 보낸 편지내용이다. 빈센트 반 고흐가 눈을 감은 지 120여년이 지났지만 프랑스의 작은 마을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는 그를 추모하는 이들의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다. 이 마을은 빈센트 반 고흐가 말년을 보내며 여러 작품을 그리다 생을 마감한 곳이다. 그는 권총으로 스스로 자해한 뒤 이 마을 공동묘지에 묻혔다. 빈센트 반 고흐의 재정적 지원자이자 그의 그림을 세상에 알리게 한 1등 공신인 테오 반 고흐도 이 곳에 그의 형과 함께 나란히 잠들어 있다. '테오 반 고흐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빈센트 반 고흐는 없었다'로 평가될 만큼 테오 반 고흐가 빈센트 반 고흐에게서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 빈센트가 화랑 판매사원, 전도사 등 진로를 여러 번 바꾸다 스물일곱의 늦은 나이에 화가가 되
1984년 1월24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쿠퍼티노의 디 앤자 칼리지 플란트센터에서 넥타이에 정장을 한 청년이 단상 위로 올랐다. 29살 이 청년의 이름은 스티브 잡스. 그는 이날 애플 주주들을 모아 놓고 신제품을 공개했다. 바로 현재의 애플의 토대가 된 '맥킨토시' 컴퓨터다. 당시 맥킨토시는 '꿈의 PC'라는 애칭이 붙을 정도로 개인용 컴퓨터(PC) 시장에 혁명을 불러왔다. 당시만해도 컴퓨터는 전문가가 아니라면 다루기 어려운 장치였는데 맥킨토시는 PC를 대중화시킨 제품이다. 특히 텍스트 중심의 인터페이스 대신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GUI)를 도입한 것은 일반인도 쓰기 쉬운 컴퓨터 환경을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맥킨토시는 화면과 본체를 하나로 붙인 일체형으로 디자인됐다. 특히 모든 장치를 도시락 크기의 박스에 집어넣어 슬림함을 강조했다. 키보드가 아닌 마우스를 움직여 조작하는 획기적인 방식은 성능면에서도 당시 다른 컴퓨터들을 압도했다. 당시 대부분의 PC가 1만달러 안팎에 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