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0 만세운동 100주년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인산일을 기해 거리에 울려 퍼진 대한독립만세의 함성이 올해로 100주년을 맞는다. 6·10 만세운동은 3·1운동, 광주학생항일운동과 함께 일제강점기 3대 항일운동으로 꼽히지만 오랫동안 '이념의 벽'에 가려 그 역사적 의미가 충분히 조명되지 못했다. 머니투데이는 '6·10 만세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조선총독부 경무국 사료를 심층 분석해 당시 항일투쟁의 성격과 역사적 의미를 짚어본다.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인산일을 기해 거리에 울려 퍼진 대한독립만세의 함성이 올해로 100주년을 맞는다. 6·10 만세운동은 3·1운동, 광주학생항일운동과 함께 일제강점기 3대 항일운동으로 꼽히지만 오랫동안 '이념의 벽'에 가려 그 역사적 의미가 충분히 조명되지 못했다. 머니투데이는 '6·10 만세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조선총독부 경무국 사료를 심층 분석해 당시 항일투쟁의 성격과 역사적 의미를 짚어본다.
총 6 건
"6·10 만세운동은 남과 북이 모두 버린 역사입니다. " 황선건 6·10만세운동유족회장은 최근 머니투데이와의 인터뷰에서 이같이 밝혔다. 남쪽에서는 사회주의 계열 운동이라는 이유로, 북측에서는 독립운동가라고 주장한 김일성의 정통성을 훼손한다는 논리로 외면 받았다는 주장이다. 황 회장은 "독립운동은 좌우가 없었다"라고 강조했다. 황 회장은 6·10만세운동에 참여한 황정환 선생의 손자다. 중동학교 특과 3학년으로 재학 중이던 황정환 선생은 22살의 나이로 종로구 숭인동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가 현장에서 체포됐다. 이후 징역 1년형이 확정돼 옥고를 치렀다. 황 회장은 6·10 만세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일제의 왜곡과 해방 이후 이념 대립 속에서 소외된 항일 운동의 역사를 온전히 복원해야 한다고 거듭 주장했다. 그는 6·10 만세운동에 대해 "조선공산당이 처음부터 끝까지 일으킨 독립운동"이라고 규정했다. 1925년 창건된 조선공산당이 이념을 내세우지 않은 채 '일본 제국주의로부터의 절대적 해방'을 첫 번째 목표로 삼았으며, 중국 상해에 있던 김단야가 거사를 기획하고 국내의 권오설이 천도교 구파와 연합해 시위를 준비했다는 설명이다.
정부가 사회주의 계열로 구분되던 6·10만세운동 항일운동가 13명에 대해 독립유공자 서훈을 결정했다. 국가보훈부는 지난 8일 6·10만세운동에 참여한 독립운동가 13명을 포상했다. 보훈부는 통상 3·1절과 8·15 광복절, 11·17 순국선열의 날에 포상을 하는데, 6·10만세운동 100주년을 계기로 이번에 특별포상에 나섰다. 정부가 사회주의 계열 운동으로 분류돼 외면 받던 6·10만세운동에 대한 재평가에 들어간 것이다. 실제로 의결 대상인 특별포상 추천명단에는 사회주의 운동에 나섰던 독립운동가도 다수 포함됐다. 이병립 선생은 1926년 6월 서울에서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 2학년에 재학 중 6·10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돼 징역 1년 및 퇴학 처분을 받았다. 그는 사회주의 계통의 조선학생과학연구회 소속으로,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를 맡고 있던 권오설의 6·10 만세운동 계획을 전달받았다. 임무는 순종 인산일 당일(1926년 6월 10일)에 길 위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선창하고 격문을 살포하는 것이었다.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인산일(장례식)을 계기로 전개된 6·10 만세운동은 3·1운동, 광주학생항일운동(1929년)과 함께 일제강점기 3대 독립운동으로 꼽힌다. 하지만 역사적 무게감에 비해 오랫동안 대중의 기억 속에서 소외되거나 '단순 소요' 수준으로 평가절하됐다. 조선총독부가 6·10 만세운동을 식민통치 체제에 도전한 사상운동이라며 경계심을 드러낸 사실이 '조선에 있어서의 동맹휴교의 고찰'(1929년)을 통해 최근 확인된 것과는 대조적이다. 일제에 충격을 안겼던 항일운동이 해방 이후 대한민국 독립운동사 연구의 주류에서 상대적으로 비중 있게 다뤄지지 못한 배경에는 '이념의 벽'이 있었다는 분석이 나온다. 6·10 만세운동은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조선공산당, 고려공산청년회 등)이 이념적 차이를 넘어 학생 대중과 연대해 준비한 민족유일당 운동의 효시다. 특히 이듬해 신간회의 좌우합작으로 이어지는 민족협동전선 흐름의 중요한 계기였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 그런데도 운동의 성과는 광복 이후 오히려 항일투쟁의 역사를 가리는 족쇄가 됐다.
1926년 6월10일 경성(현 서울)에서 벌어진 6·10 만세운동의 주역은 중앙고등보통학교(현 중앙고)·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 등 학생들이다. 사회주의·민족주의 인사들의 거사 직전 발각에도 학생 조직의 치밀하고 은밀한 준비로 만세운동이 이뤄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제는 중앙고보 출신 이선호, 연희전문 출신 권오상 등 학생 200여명을 만세운동 현장에서 검거했다. 특히 만세운동의 배후 조직 세력이 조선공산당 등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임을 알면서도 학생들에 의해서 벌어진 것으로 축소했다. 하지만 일제의 의도와 달리 만세운동은 전국의 학생운동을 촉발시켜 동맹휴교라는 결과를 낳았다. 6·10 만세운동은 사회주의·민족주의 계열의 '연합전선' 가능성을 보여줬고 이듬해 2월 '신간회'의 창립으로 이어졌다. ━경성에서 울려퍼진 학생들의 '만세'…전국으로 번져나가다━10일 머니투데이 특별취재팀이 '6·10 만세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확보한 조선총독부 문건 '조선에 있어서의 동맹휴교의 고찰'(1929년)에선 일제의 위기의식이 엿보인다.
1926년 6월10일 순종 인산일(장례식). 검은 상복 물결로 뒤덮인 경성 한복판에서 학생들이 일제히 거리로 뛰쳐나왔다. 이들은 소매 속에 숨겨둔 격문(檄文)을 허공에 뿌리며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시민들이 시위에 합세하면서 종로 일대는 순식간에 만세 함성으로 뒤덮였다. 6·10 만세운동은 학생들이 주도한 항일 시위로 기억되지만 역사학계에선 학생 운동을 넘어 사회주의·민족주의 계열이 처음으로 연대한 '연합전선' 성격의 독립운동으로 평가한다. 10일 머니투데이 특별취재팀이 '6·10 만세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확보한 조선총독부 문건 '조선에 있어서의 동맹휴교의 고찰'(1929년) 역시 이런 시각을 뒷받침한다. 문건에 따르면 일제는 당시 6·10 만세운동을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이 기획한 조직적 항일투쟁으로 인식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학생들이 시작한 '만세'…경성 전역으로 번지다━1926년 6월10일 오전 6시 창덕궁 돈화문 앞에는 순종의 국장을 보기 위해 전국에서 수십 만명의 인파가 몰려들었다.
조선총독부가 '6·10 만세운동'을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 세력이 주도한 조직적 항일투쟁으로 판단했던 기록이 확인됐다. 일제는 당시 운동을 순종 인산일(장례식)에 벌어진 학생들의 우발적 시위로 선전하며 축소하려 했으나 내부적으로는 식민통치에 맞선 조직적 사상운동으로 규정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10일 머니투데이가 '6·10 만세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확보한 '조선에 있어서의 동맹휴교의 고찰'(1929년)에는 순종 장례식 전후 경성 시내 치안 불안에 대한 일제 내부의 인식이 담겼다. 이 사료는 일제강점기 사상 통제와 독립운동 탄압을 담당하던 조선총독부 경무국이 일본 내무성에 보고한 문건이다. 1929년 초대 척무대신을 지낸 마쓰다 겐지(松田源治·1875~1936)가 소장했던 기록물로 일본 패망 이후 도쿄의 국립국회도서관으로 넘어간 원문을 본지 특별취재팀이 분석했다. 1919년 3·1 운동 이후 위기감을 느낀 조선총독부가 6·10 만세운동과 광주학생항일운동(1929년) 등 조선 학생들이 참여한 항일투쟁을 어떻게 추적·분석했는지를 보여주는 핵심 사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