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년 10월28일. 청산가리가 든 막걸리로 아내이자 어머니를 살해한 혐의로 각각 무기징역과 징역 20년을 선고받았던 아버지와 딸이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사건 발생 16년 만이자 두 사람이 약 15년간 옥살이한 끝에 나온 판결이었다.
부녀를 살인범으로 만든 핵심 증거는 자백이었다. 하지만 재심 재판부는 검찰이 유도신문 등 위법한 수사로 받아낸 진술이라고 판단했다. 두 사람이 살인범이라는 판단은 뒤집혔지만, 막걸리에 청산가리를 넣어 주민 2명을 숨지게 한 진범은 여전히 밝혀지지 않았다.
집 앞에 놓인 막걸리, 아내에게 건넨 남편
사건은 2009년 7월6일 전남 순천시 황전면의 한 마을에서 발생했다. 마을 주민 여성 4명이 막걸리를 나눠 마신 뒤 쓰러졌다. 막걸리에는 독극물인 청산가리가 들어 있었고, 이 가운데 2명이 숨지고 2명이 중상을 입었다.
문제의 막걸리는 사망한 여성 남편 A씨가 준 것이었다. 그는 당일 아침 집 앞에서 막걸리를 발견해 다른 주민들과 여행을 떠나는 아내에게 건넸다.

경찰은 수사에 나섰지만 범인을 특정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검찰이 피해자의 남편 A씨와 막내딸 B씨를 범인으로 지목하면서 사건은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검찰이 제시한 범행 동기는 충격적이었다. 아버지와 딸이 부적절한 관계를 맺어왔고, 이를 알게 된 아내이자 어머니를 살해하기 위해 범행을 공모했다는 것이었다.
검찰은 부녀가 막걸리에 청산가리를 넣었고, 이를 마신 다른 주민들까지 피해를 봤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부녀가 범행을 저질렀다는 직접적인 물증은 부족했다. 유죄를 뒷받침하는 핵심 증거는 두 사람의 자백이었다.
1심 무죄 뒤집은 항소심…부녀에게 무기징역·징역 20년
살인과 존속살해, 살인미수 등의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부녀는 2010년 2월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재판부는 두 사람의 자백을 믿기 어렵고 범행을 입증할 객관적인 증거도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항소심 판단은 달랐다. 2011년 11월 광주고법은 1심 판결을 뒤집고 아버지 A씨에게 무기징역, 딸 B씨에게 징역 20년을 선고했다. 검찰이 확보한 자백 등을 유죄의 주요 근거로 받아들인 것이다.
2012년 3월 대법원도 상고를 기각하면서 형이 확정됐다.
부녀는 아내이자 어머니를 살해한 범인으로 낙인찍힌 채 수감 생활을 이어갔다. 하지만 이들 자백을 둘러싼 의혹은 사라지지 않았다.
한글 못 쓰는 아버지의 진술서엔 오탈자 하나 없었다
사건은 재심 전문 박준영 변호사가 수사 기록을 검토하면서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박 변호사는 2021년 검찰의 수사 기록과 조사 영상을 확인한 뒤 자백의 신빙성과 증거 누락 문제 등을 제기했고, 부녀는 2022년 1월 재심을 청구했다.
당시 A씨는 초등학교를 나오지 못해 한글을 제대로 읽거나 쓰지 못했다. 딸 B씨도 경계선 지능 상태였다. 그런데 검찰이 유죄 증거로 제출한 아버지의 장문 자필 진술서에는 오탈자가 하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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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의 조사 영상에서도 수사관이 청산가리의 생김새를 설명하지 못하는 B씨에게 답변을 알려주거나 특정한 대답을 요구하는 모습이 확인됐다. 검찰이 딸에게 아버지가 자신을 범인으로 몰고 있다는 취지의 말을 하며 자백을 압박했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물증에도 의문이 있었다. 범행 도구로 지목된 플라스틱 수저에서는 청산염이 검출되지 않았고, 부녀가 막걸리를 구매하러 이동했다는 검찰 주장과 달리 관련 차량은 CCTV에 찍히지 않았다. 변호인 측은 이러한 증거가 당시 재판에서 제대로 제출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검찰은 수사에 문제가 없었다는 입장을 유지했다.
재심 무죄…16년 만에 살인범 누명 벗었다

2024년 1월 광주고법은 재심 개시를 결정하고 형 집행을 정지했다. 부녀는 약 15년 만에 교도소에서 풀려났다. 검찰이 불복했지만 같은 해 9월 대법원이 재항고를 기각하면서 재심이 진행됐다.
이후 2025년 10월28일 광주고법은 부녀의 살인·존속살해·살인미수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검찰이 객관적인 근거 없이 부녀의 부적절한 관계를 범행 동기로 의심하고, 유도신문으로 자백을 받아냈다고 판단했다. 자백을 제외하면 두 사람이 청산가리를 막걸리에 넣었다고 인정할 만한 증거도 부족했다.
검찰은 같은 해 11월4일 상고를 포기했고 부녀의 살인 관련 혐의에 대한 무죄가 확정됐다.
그러나 진범은 여전히 밝혀지지 않았다. 경찰은 부녀의 무죄 판결 이후 사건을 미제사건 전담수사팀에 배당하고 초기 수사 기록을 다시 검토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