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운드에서는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하루 뒤 다시 만난 한국과 대만의 차세대 에이스는 웃으며 손을 맞잡았다. 하현승(18·부산고)과 류런유(17)의 다음 약속은 더 큰 무대에서의 재회였다.
제14회 아시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에 출전 중인 하현승과 류런유는 지난 8일 대만 타이베이에 위치한 대표팀 숙소 식당에서 다시 만났다. 이번 대회에 참가한 8개국 선수단은 같은 숙소에서 생활하고 있다.
불과 하루 전만 해도 둘은 서로 반드시 넘어야 할 상대였다. 한국은 7일 타이베이 티엔무구장에서 열린 B조 조별리그 1차전에서 개최국 대만을 2-0으로 꺾었다. 8년 만의 아시아 정상 탈환을 노리는 한국에는 첫판부터 만난 가장 까다로운 상대였다.
양 팀 선발투수가 명품 투수전을 펼쳤다. 하현승은 5⅔이닝 동안 단 2안타만 허용하며 무려 12개의 삼진을 솎아내 무실점으로 대만 타선을 봉쇄했다. 최고 시속 152㎞ 직구에 슬라이더와 체인지업을 섞었고, 특히 직구와 변화구가 비슷한 궤적에서 갈라지는 터널링에 대만 타자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대만 타선에서 유일하게 하현승에게 장타를 때린 주장 창이안조차 현지 매체와 인터뷰에서 "하현승의 직구와 슬라이더 궤적이 정말 똑같았다. 체인지업까지 섞여 들어오니 타자들이 급해졌다"고 어려움을 인정했다.

그러나 하현승 못지않게 강렬했던 투수가 류런유였다. 190㎝가 넘는 큰 키에서 시속 150㎞를 넘나드는 공을 던지는 좌완 류런유는 한국을 상대로 5이닝 동안 삼진 6개를 잡아내며 안타와 실점을 내주지 않았다. 한국 대표팀 선수들도 "직구가 바운드돼서 오는 것으로 판단해 배트를 휘두르지 않았는데 낮은 존에 스트라이크로 들어올 정도로 구위가 압도적이었다"라고 혀를 내둘렀다.
정 감독 역시 "류런유의 공이 너무 좋아 초반에는 점수를 내기 힘들다고 봤다. 50~60구를 넘겨 힘이 떨어진 뒤에야 승부가 날 것으로 생각했다"고 돌아봤다.
독자들의 PICK!
결국 균형은 류런유가 내려간 6회 깨졌다. 투구 수 제한인 90구까지 여유가 있었지만 류런유는 더 이상 마운드에 오르지 않았다. 슈퍼라운드 첫 경기에 등판하기 위해선 90구가 한계 투구 수였다.
한국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2점을 뽑아 승리를 가져갔다. 류런유에게는 아쉬움이 컸다. 자신이 내려간 직후 대만 대표팀이 6회 실점하자 류런유는 마운드에서 모자를 눌러쓴 채 감정을 추스르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류런유는 "감독님께서는 더 버틸 수 있냐고 물었는데 내가 내려갔다"며 "이미 한계가 온 게 느껴졌다. 한국 타자들의 기세가 너무 좋아서 초반부터 큰 힘을 쏟아부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이어 "울컥했다. 하현승과 마운드에서 더 싸우고 싶었는데 일찍 내려갔다"며 "팀을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했다.

그렇게 치열하게 싸운 두 투수가 하루 뒤 식당에서 마주쳤다. 둘은 서로를 발견하자 악수를 나눴고 하현승이 류런유와 대만 관계자들이 앉아 있던 자리에 합석했다. 전날 팽팽했던 마운드의 긴장감 대신 웃음과 야구 이야기가 자리를 채웠다.
중학교 시절부터 하현승을 알고 있었다는 류런유는 이번 맞대결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고 했다. 특히 하현승이 미국프로야구 메이저리그(MLB) 구단으로부터 거액의 제안을 받았다는 소식을 접한 뒤 맞대결을 기다렸다고 했다.
류런유는 "미국 메이저리그 명문 구단으로부터 300만 달러 오퍼를 받은 선수다. 대만에는 이런 선수가 없다. 어떤 선수인지 궁금해서 한번 붙어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직접 본 하현승은 기대 이상이었다. 류런유는 "릴리스 포인트가 너무나도 훌륭했고, 직구와 변화구의 궤적이 같아 타자들이 어려워했다"며 "6회까지도 힘차게 공을 뿌리는 스태미나가 인상 깊었다"고 평가했다.
하현승 역시 류런유의 공을 높게 평가했다. 하현승은 "구위와 수직 무브먼트가 너무 좋았다. 기존 슬라이더에 속도를 더한 컷 패스트볼이나 슬라이더와 반대 방향으로 체인지업 계열의 변화구를 구사하면 타자들이 지금보다 류런유의 공을 더 못 건드릴 것 같다"고 분석했다. 그러자 류런유는 "스위퍼를 연습 중"이라고 답했다.

전날 자신과 맞붙은 타자 이야기도 빠지지 않았다. 류런유는 한국 타자 가운데 주장 엄준상(18·덕수고)을 가장 인상적인 선수로 꼽았다. 그는 "1회 첫 타석에서 완벽하게 들어갔다고 생각한 공이라 무조건 땅볼 타구가 나올 것으로 생각했는데, 정타를 맞혀 외야로 강한 타구를 보낼 줄 몰랐다. 깜짝 놀랐다"고 돌아봤다.
하현승은 자신에게 3루타를 때렸던 창이안까지 직접 찾아갔다. 경기 후 창이안이 하현승의 공이 예상보다 어렵지 않았다는 취지로 이야기했다는 현지 보도를 접한 뒤 통역과 함께 직접 평가를 들으러 간 것이다. 약 5분 동안 대화를 나눈 하현승은 "막상 직접 물어보니 칭찬만 해줬다"고 웃었다.
이번 한·대만전에는 MLB 스카우터 15명이 현장을 찾은 것으로 전해졌다. 한 MLB 스카우트는 양 팀 에이스의 맞대결을 지켜본 뒤 "기대 이상으로 훌륭한 경기였다. 투수들이 다 했다"고 엄지를 치켜세웠다.
두 유망주의 시선도 이미 더 높은 곳을 향했다. 류런유는 "이제 우리를 중심으로 새로운 시대가 열린다"며 "앞으로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이나 프리미어12 같은 더 높은 레벨의 대회에서 더 발전한 모습으로 만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하현승도 "나보다 좋은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 이번 경기를 통해 많이 배웠다. 지난해보다 발전한 모습으로 온 걸 보니 내가 뿌듯할 정도였다. 이번이 마지막 대결이 아니라 아시안게임을 비롯해 세계 무대에서도 만나야 한다. 서로 준비 잘해서 또 만났으면 좋겠다"고 미소 지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