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보는 세상]압력에 굴하지 않았던 선생님

[우리가 보는 세상]압력에 굴하지 않았던 선생님

양영권 기자
2013.05.09 06:03
[편집자주] 뉴스현장에는 희로애락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기사로 쓰기에 쉽지 않은 것도 있고,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할 일도 많습니다. ‘우리들이 보는 세상(우보세)’은 머니투데이 시니어 기자들이 속보 기사에서 자칫 놓치기 쉬운 ‘뉴스 속의 뉴스’, ‘뉴스 속의 스토리’를 전하는 코너 입니다.
일러스트=김현정
일러스트=김현정

"problem! 정답은 'problem'이야. 이 쉬운 답을 맞힌 사람이 이 반엔 한 명도 없어?"

25년 전, 한 섬마을 중학교의 중간고사 영어시험 문제풀이 시간. 선생님은 답을 말한 뒤 한심하다는 듯 학생들을 내려 봤다. 그런데 소년의 시험지에는 분명히 'problem'이라고 적혀 있었다. 손을 들고 항의했다.

"선생님, 저는 답을 맞혔는데요."

"자세히 봐. 'problem'이 아니라 'broblem'이라고 적었어."

아뿔싸. 시험지엔 정답을 적고도 답안지에 옮길 때 'p'를 'b'로 쓴 게 아닌가. 실수였다. 2점짜리였는데...

며칠 뒤 중간고사 전체과목 가채점 결과가 나왔다. 소년이 반에서 아슬아슬한 1등이었다. 2등과는 단 1점 차이.

이튿날 2등을 한 친구가 소년에게 왔다. 곧 서울로 전학을 갈 친구는 "어머니가 영어 선생님한테 말해서 내 점수를 2점 올려주기로 했어. '1등 했던 아이'로 전학을 가는 게 모양이 좋을 것 같아서..."라고 했다.

친구네는 읍내에서 큰 가게를 하는 부자였다. 그 애 어머니는 '어머니회 회장'을 맡아 '교장, 교감선생님도 움직일 수 있는 존재'였다. 그 어머니가 특별히 영어 선생님께 부탁해서 등수를 바꾸겠다는 것이다. 옛날에는 그런 게 가능했던 것 같다. 영어 선생님도 교장, 교감선생님을 통해 '압력'을 받았을지 모른다. '교육계 비리'를 마주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요즘처럼 인터넷 게시판도 없던 시대에, 소년은 무력했다.

드디어 정정기간이 지나고 확정된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실제로 친구는 총점 2점이 올라 있었다. 그런데 1등을 하지는 못하고 여전히 2등이었다. 1등은 그대로 소년이었다. 소년의 영어 점수도 마찬가지로 가채점 때보다 2점이 올라 있었던 것이다.

그보다 며칠 전의 일이다. 쉬는 시간, 다른 반 수업을 마친 영어 선생님은 소년을 복도로 불렀다.

"진짜 'problem'을 알고 있었는데, 실수했던 거야?"

소년이 고개를 끄덕이자, 선생님은 "알았어"라는 말을 남겼다. 그리고 소년은 반에서 유일하게 그 문제의 정답을 맞힌 학생이 돼 있었다.

스승의 날을 앞두고 교사의 체벌과 성추행 등을 다룬 기사들이 넘쳐 난다. 그런 기사의 댓글에는 학창시절 겪은 교사에 대한 부정적인 기억도 꼬리를 잇는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가 있는 것은 각자에게 소년의 선생님과도 같은 분이 계셨기 때문이 분명하다.

유홍준 교수가 연밥을 따던 할아버지에게 더러운 진흙탕 속에서 연꽃이 피는 비결을 물었다. "저쪽 좀 봐. 물이 졸졸 흐르지. 저렇게 맑은 물이 살살 흘러야 그게 생명수가 되어 꽃이 자라는 거야."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2권에 나오는 일화다.

교육계는 악취가 난다고 하는 이들은 나에게 '맑은 물줄기'와 같은 선생님은 누구였는지 떠올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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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니투데이 논설위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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