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리포트]정제 후 남은 잔사유로 고부가 휘발유·경유 생산...원가경쟁력 확보 원천

수입 원유를 정제해 만든 석유제품의 절반 이상을 수출하는 국내 정유사들에게 원가경쟁력 확보는 선택이 아닌 필수다. 저유가시대를 겪고 있는 정유사들은 원유 수입처 다변화 노력과 함께 고도화 설비를 활용해 경영실적을 공고히하고 있다.
고도화 설비 비율이 높다는 것은 똑같은 양의 원유를 사용해 비싸게 팔 수 있는 석유제품을 더 많이 생산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SK이노베이션, GS칼텍스, S-OIL, 현대오일뱅크 등 국내 정유 4사는 지난 1분기 정유부문에서만 9862억원의 영업이익을 달성하는 등 직전 분기 3576억원의 세 배에 가까운 실적을 기록했다. 올해 2분기에도 총 2조원 이상의 영업이익을 거둘 것으로 추정된다.
◇ 고도화 설비, 저유가 파고 넘는 해법
국내 정유사들은 완만한 유가 상승에 따른 재고 평가이익, 제품 판매 증가에 따른 수익, 제품 생산원가와 판매가격 차이에 의한 정제마진 등으로 영업이익을 얻고 있다.
세계적인 정유사들보다 규모가 작아 국제 원유가격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국내 정유사들 입장에선 재고 평가이익은 운이 좋을 때 얻게 되는 부가수익이라고 할 수 있다. 석유제품에 대한 수요가 끝없이 증가하는 것도 아니어서 제품 판매에 따른 수익 증가도 한계가 있다.
정유사들이 스스로의 노력으로 할 수 있는 건 생산원가 인하로 판매마진을 높이는 것인데, 이를 위해 고도화 설비에 투자하고 있다. 지금처럼 저유가가 지속되는 상황에서는 수익성을 높일 수 있는 주요한 방안으로 꼽힌다.
고도화 설비는 원유를 단순 정제한 후 남는 잔사유를 휘발유, 경유 등 경질유로 전환하는 시설이다.
잔사유의 단단한 탄소원자 결합 고리를 끊어내는 것이 핵심 공정인데 현재로서는 세 가지 방식이 있다. 잔사유에 수소를 첨가해 화학 반응을 일으키는 공정과 섭씨 400도 이상의 열을 가하는 공정, 미세 분말 형태의 촉매와 반응시키는 공정 등이다. 국내 정유사 중에서는 현대오일뱅크가 유일하게 세 가지 방식의 고도화 설비를 모두 갖추고 있다.

◇ 고도화 설비가 중요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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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정유사들이 주로 들여오는 중동산 원유는 단순 정제했을 때 대략 40%가 벙커C유 및 아스팔트 등 잔사유로 남는다. 잔사유는 국제시장에서 중동산 원유보다 보통 배럴당 10달러 정도 저렴하게 거래된다.
휘발유, 경유 등 경질유가 국제 원유가 대비 배럴당 약 10달러 비싸게 거래되는 것과 비교한다면 차이는 더욱 커진다. 때문에 잔사유를 고부가가치 제품인 휘발유, 경유 등으로 전환하는 고도화 설비는 정유사의 원가 경쟁력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
내수 시장 규모가 작아 수출에 주력하는 국내 정유사들은 원가경쟁력 확보를 위해 일찌감치 수조원을 투입해 고도화 설비를 갖췄다.
그 결과 잔사유 등 중질유를 분해해 경질유로 전환할 수 있는 처리 능력과 원유 단순정제 처리 능력의 비율인 고도화 비율은 2015년 1월 기준 국내 정유사들이 24.4%로 중국(17.2%), 싱가포르(16.9%) 등 경쟁국들보다 앞서고 있다.
국내 정유사 중에는 현대오일뱅크가 고도화 비율 39.1%로 선두이며, 이 덕에 2014년 유가 폭락기 국내외 주요 정유사들이 대규모 적자를 기록할 때도 정유부문에서 2000억원가량의 영업이익을 달성할 수 있었다.
현대오일뱅크는 1988년 국내 최초로 고도화 설비를 도입했으며, 2011년 제2고도화 프로젝트와 수차례의 시설 개선을 통해 현재의 고도화비율을 갖췄다.
현대오일뱅크는 2018년까지 약 5000억원을 투자해 기존 고도화 설비 기능을 한 단계 높이고, 고도화 처리 전 단계에 하루 8만 배럴의 잔사유를 처리할 수 있는 SDA(Solvent De-Asphalting, 용제 탈 아스팔트) 공정을 추가할 계획이다.
SDA공정은 잔사유에서 불순물을 제거해 촉매 수명을 연장하고 고도화 설비에 투입할 수 있는 양을 늘리는 역할을 한다. 잔사유에 포함된 금속, 황, 질소 등의 불순물은 고도화 공정에 투입될 경우 경질유로 전환되지 않고 촉매에 달라붙어 촉매 수명을 단축시키고 경질유 수율을 감소시킨다.
고도화 설비 업그레이드가 완료되면 현대오일뱅크의 고도화 비율은 현재 39.1%에서 46%대로 높아지고, 정유부문에서 추가적으로 2000억원의 영업이익을 거둘 수 있을 것으로 회사 측은 기대하고 있다.
국내 정유사들의 정제 설비 고도화율은 현대오일뱅크(39.1%), GS칼텍스(34.9%), SK에너지(23.7%), S-OIL(22.1%) 순이다
◇ 고도화 설비에 대한 오해…제품 품질 하락? 고도화율만큼만 휘발유 재생산?
고도화 설비 덕분에 수익성을 높여가는 정유업계지만 소비자들로부터 오해받는 부분도 있다. 저가의 벙커C유 등 중질유를 분해해 휘발유, 경유 등으로 전환하기 때문에 원유를 단순정제 시설에 투입해 나오는 제품보다 품질이 떨어지지 않겠냐는 시선을 받고 있다.
이는 기우에 불과하다. 단단한 탄소고리로 이어진 벙커C유를 고도화 설비를 통해 깨트려 제품을 만들면 일반 원유를 정제했을 때 생산되는 휘발유제품 등과 동일한 분자 구조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정유사들은 탈황공정 등 고도화 후처리 공정을 통해 황, 질소 화합물 등을 제거하고 있어 원료와 상관없이 최종 제품은 동일한 규격으로 만들 수 있다.
실제로 정부는 석유제품의 환경 오염물질 함량과 차량 엔진을 보호하는 옥탄가 등을 규격화하고 있고 국내 규격은 세계적으로도 엄격한 편이다. 국내 생산 석유제품이 50% 이상 수출되는 것도 그만큼 품질을 인정받고 있어서다.
고도화 비율도 소비자들이 이해하기 쉽지 않은 용어다. 39.1%로 국내 최고 수준의 고도화 설비를 가동하는 현대오일뱅크 공장은 원유 100리터를 투입했을 때 저가의 벙커C유는 최종적으로 2리터밖에 나오지 않는다. 투입원유 전량 대부분을 고부가가치인 경질유로 만든 것이다.
하지만 고도화 비율이 39.1%라고 하니 경질유 생산 능력을 전체 생산량의 39.1%라고 잘못 이해하고 그간 고유가에 취해 설비 투자를 등한시한 게 아니냐는 오해도 받는다.
정유업계는 이론적으로 고도화 비율이 40% 정도면 우리나라에서 주로 도입하는 중동산 원유를 정유공장에 투입했을 때 전량(부산물 제외 : BTX, 윤활기유, 슬러리 오일 등)을 고부가가치 경질유로 생산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만약 46%의 고도화 비율이 현실화된다면 현대오일뱅크는 단순정제 설비에서 나오는 잔사유보다 더 많은 양의 잔사유를 고도화 설비에 투입해 경질유로 전환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되면 굳이 비싼 원유를 구입하지 않고 국제시장에서 값싼 벙커C유만을 사서 고도화 설비에 직접 투입할 수도 있다.
실제 고도화 비율이 50%를 넘는 미국 등 선진국 일부 정유공장은 다른 나라에서 생산한 벙커C유를 싸게 구매한 후, 경질유로 재생산해 비싸게 되팔며 수익을 극대화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