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E도 아니고, S도 아니고, G 때문이다. 우리나라 기업이 ESG(환경·사회·지배구조)를 얘기하는데 다른 나라에 비해 소극적인 이유 말이다. 환경이나 사회 문제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얘기할 수 있는 분위기가 됐다. 그래도 지배구조 얘기를 꺼내긴 아직 힘들다. 보고서를 받아들 오너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어서다.
지배구조(거버넌스)를 손보자는데 민감하지 않을 그룹 오너는 없다. 바꿔 말하면 ESG를 제대로 얘기하려면 오너가 직접 나서는 수밖에 없다. "나는 정말 괜찮으니 의견을 말해다오"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그래도 쉽지 않다. 쿨하게 허락했는데 막상 닥치고 나면 맘 상하는 일이 어디 한둘인가.
강제로 하면 안 하는 것보단 낫지만 노력 대비 효과와 감동이 줄어든다. 대한항공 대표이사인 조원태 한진칼 회장은 직원들의 생활을 살뜰히 챙기고 조언을 귀 담아듣는 걸로 유명하다. 그런 조 회장도 ESG 경영 도입엔 소극적이었다. 경영권 분쟁이 붙으면서 발등에 불이 떨어지자 부랴부랴 거버넌스 재편에 나섰다. 일찌감치 먼저 손을 댔더라면 어땠을까.
조 회장은 그나마 나은 편이다. 여전히 ESG의 E자도 꺼내지 못하게 하는 오너들이 재계엔 차고 넘친다. 환경규제에 걸려 해외에서 물건을 팔지 못하게 될까봐 조바심을 내고,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기업이 되려고 안간힘을 쓰면서도 유독 거버넌스 문제에만은 헛기침을 하며 뒷짐을 진다.
'왜 안하냐'며 무작정 몰아붙일 일이 아니다. 선례도 없고, 법은 기업의 편이 아니다. '상속세 몇 번 내려면 회사를 다 팔아야 한다'는 말은 이제 일반론이다. 온 세상이 '사회안전망'을 만드느라 떠들썩한데, 오너십이 재편되면서 패닉을 겪을 기업에 대한 안전망은 어디에 있나. 안전망도 없는데 용기를 내라고 요구하는 건 가혹하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지난 9월 전 직원에게 "ESG를 경영의 새로운 축으로 삼겠다"고 선언한 건 그래서 놀라운 일이다. CEO들에게는 "계열사별로 ESG 기반 성장 스토리를 구체적으로 제시하라"고 지시했다. 최근 한 세미나에서는 "기업의 ESG 도입은 이제 선택이 아니라 규칙"이라고 다시 강조했다.
최 회장은 이미 사회적 가치 전도사다. 기업이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고 해결하는데 힘을 보태야 한다는 거다. 여기에 더해 'G'를 직접 언급하기 시작했다. 거버넌스 개편은 결국 소유와 경영을 분리하겠다는 것이며, 감시와 참견을 더 받아들이겠다는 것이다. 거기에 오너가 먼저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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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회장은 사업 뿐 아니라 개인사까지 일거수 일투족 주목받는 경영인이다. 대중에 부각되는 데 부담을 느낄 법도 하다. 그래도 경영과 철학 양쪽에서 끝없이 새로운 화두를 던지고, 끝없이 정면돌파한다. 그런 최 회장에게 얼마 전 직원들은 사내방송을 통해 '이태원 클라쓰'를 패러디한 '최태원 클라쓰'라는 타이틀을 달아줬다. 클라쓰(class)가 있다면 이런 게 클라쓰다.
최 회장의 'ESG 선언'이 공허하게 느껴지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다. 그가 ESG 추구의 최종 목표에 '사업의 성공'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최 회장은 ESG 경영을 통해 '착한 기업, 사회에 이익이 되는 기업'으로 인정 받아야 고객의 선택을 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 최 회장에게 ESG 경영은 단순 철학이 아니라 '시장에 대한 강력한 전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