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월부터 35도를 웃도는 '불볕더위'가 이어지자 베이징의 한 가전 전문점은 일찌감치 에어컨 판촉 행사를 시작했다. 정부가 지급하는 보조금을 활용해 최대 40%까지 할인을 제공한다. 주 대상은 중국 내 '빅 3' 가전 브랜드인 그리전기와 메이디, 하이얼이다. 한국·일본 에어컨 브랜드도 판매하지만, 찾는 소비자가 없어 이번 행사에서는 빠졌다. 이 전문점 관계자는 "지난해 LG 등 한국 에어컨을 구매한 고객 수는 손가락에 꼽을 정도"라며 "올해도 크게 구매가 늘 것 같지 않아 발주량을 줄이고 판촉 행사에서도 제외했다"고 밝혔다.
이번 여름 역대 최고 수준의 더위가 예보되면서 중국 에어컨 시장이 기지개를 켜고 있다. 코로나19 시기 판매량이 꾸준히 감소해 왔지만, 연초 내수 촉진 정책과 무더위에 힘입어 반등이 예고됐다. 현지 업계는 올해 중국 에어컨 브랜드의 약진을 확실시하는 분위기다. 가성비를 선호하는 소비 특성, 부동산 업계와의 협업과 보조금 지급 등 해외 브랜드가 넘을 수 없는 '만리장성'을 구축했다는 자신감이다.

중국 내 에어컨 시장은 '3대 거인'이 과점하고 있다. 지난해 각사 사업보고서와 시장조사업체 아오웨이 등에 따르면 그리전기와 메이디, 하이얼의 시장점유율은 70%를 웃돈다. 그리전기가 33.9%의 시장점유율로 28년 연속 1위를 차지했으며, 메이디가 33.7%, 하이얼이 10% 수준이다. 그리전기와 메이디는 에어컨 시장에서만 1300억 위안(한화 약 25조원)에 달하는 매출을 거뒀다.
연간 에어컨 판매량만 5714만대(2022년 기준)에 달할 정도로 매머드급 시장이다 보니 해외 에어컨 브랜드도 시장 진출에 적극적이었다. 한국에서는 삼성전자와 LG전자가, 일본에서는 히타치·다이킨과 미국의 캐리어 등 글로벌 업체가 각축전을 벌였다. 특히 캐리어의 경우 2019년 중국 시장에 진출한 뒤 중국을 발판삼아 전사 매출의 50%를 해외에서 달성하겠다는 목표를 발표하는 등 공을 들였다.
하지만 현지 업계는 중국 시장에서 해외 에어컨의 선호도는 높지 않다고 입을 모은다. '3대 거인'은 물론 판매량 기준 10위권 내의 기업이 하이센스, TCL, 샤오미 등 대부분 자국 브랜드다. 해외 브랜드는 창홍·AUX 등 대형 기업에 비해 상대적으로 규모가 크지 않은 자국 브랜드에도 맥을 못 춘다. 국내 기업도 삼성전자가 중국 시장에서 철수했으며, LG전자도 사실상 개점휴업에 가까운 상태다.
주 요인은 가격이다. 현지 시장에서는 6000~7000위안(약 114만~133만원)이 넘으면 '고급 에어컨'으로 보는데, 해외 브랜드의 대부분은 가격이 이 범위를 웃돈다. 국내 브랜드의 경우 상대적으로 가격대가 저렴한 창문형·이동식 에어컨도 100만~110만원대이며, 프리미엄 제품은 600만원을 훌쩍 넘는다. 반면 그리전기·메이디의 '스테디셀러'는 대부분 4000~5000위안에 가격이 형성돼 있으며, 3000위안대의 제품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연간 1150억위안(약 21조원) 규모로 최근 성장세가 가파른 시스템에어컨 시장도 중국 업체가 '황금방벽'을 쌓고 있다. 아파트나 학교 등 대형 건물에 들어가 B2B(기업 간 거래) 거래가 많은 시스템에어컨 특성상 건설업체나 부동산 관리기업과의 협업이 중요하다. 메이디는 위엔롱 부동산 관리회사, 하이얼은 취엔팡통 임대아파트 전문기업 등과 밀월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독자들의 PICK!
메이디 관계자는 "메이디는 수천여개 이상의 HVAC(냉난방·환기) 제품 라인업을 확보하고 있으며, 중국 시장을 선도하는 기업"이라며 "전국 주요 도시에 서비스 매장을 두고 강력한 판매 플랫폼을 구축해 높은 소비자 선호도를 보인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경쟁 기업에 비해 저렴한 가격은 물론 우수한 품질을 겸비했다"라고 자평했다.

올해 기온이 예년보다 최대 6~7도 오르는 등 불볕더위가 이어질 것으로 보이면서 에어컨 시장의 규모는 더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올 1분기 시스템 에어컨 시장의 매출만 5조원을 넘겼다. 특히 그리전기와 메이디의 경쟁이 심화되면서 양사의 투자가 확대되는 추세다. 그리전기는 지난해 더난환경과 인롱에너지를 인수하는 등 거대 가전기업으로 거듭나고 있으며, 메이디는 온라인 소매 판매 채널을 대폭 늘렸다.
여기에 중국 정부가 내수 촉진을 위해 올초부터 시행 중인 최대 20%의 보조금을 합하면 가격 경쟁력이 더 강화될 전망이다. 중국 소비자가 1000위안 이상의 가전제품을 구매할 경우 500위안을 한도로 최대 20%의 보조금 지원을 받을 수 있다. 1선 도시에 비해 구매력이 낮지만 규모가 큰 2~3선 도시 위주로 저렴한 자국 브랜드 선호도가 올라갈 것으로 보인다.
업계 관계자는 "B2C(기업과 소비자 거래)는 물론 B2B 시장까지 여기에 지역 정부의 지원이 더해지면 입찰 없이 중국 기업이 계약을 따내는 경우가 수두룩하다"라며 "해외 기업의 진입이 사실상 불가능한 구조로, 아직까지 현지 소비자들은 에너지 효율이나 친환경 인증보다는 가격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당분간 이같은 흐름이 이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