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은 석유 한방울 나지 않는 나라지만 정유업계는 수출을 통해 막대한 이익을 창출해왔다. 전량 수입한 원유를 석유제품으로 전환하는 정제 능력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내 정유 4사의 정제 능력은 하루 336만 배럴이다. 중국과 미국, 러시아, 인도에 이은 세계 5위다. 원유를 정제해 나온 벙커C유 등 저부가 제품을 휘발유와 경유 등 고부가가치 제품으로 전환하는 고도화 설비에 대한 투자도 2007년부터 2024년까지 약 34조원이 이뤄졌다. 비산유국이지만 고부가가치 제품 생산 비중을 높일 수 있는 구조를 구축하면서 생산 효율성과 가격 경쟁력을 동시에 확보하고 있는 셈이다. 특히 별도의 추가 정제 없이 다양한 국가로 곧바로 수출할 수 있도록 글로벌 기준에 부합하는 제품 품질까지 갖추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일궈낸 국내 석유제품 수출금액은 지난해 기준으로 전체 4위에 올랐다. 여기에 원유 수입금액의 약 60%를 수출하며 무역수지 개선에도 기여했다. 비산유국이지만 세계 5대 석유제품 수출국 반열에 올라선 배경이다.

하지만 최근 중동 전쟁으로 호르무즈 해협이 사실상 봉쇄되면서 석유제품 수출은 주춤하는 분위기다. 전체 석유제품 생산에서 내수가 차지하는 비중은 지난 2월 56.4%에서 3월 60.6%로 상승했고, 같은 기간 수출 비중은 35.9%에서 31.3%로 낮아졌다. 지난 3월 정유 4사의 휘발유·경유·항공유·등유 등 석유제품 수출 물량은 전월 대비 17.7% 줄어든 것으로 파악됐다. 수출 약화 추세라는 흐름이 즉각적으로 지표에서 드러난 것이다.
무엇보다 글로벌 원유 수급 불안이 정유업계의 발목을 잡고 있다. 원유 도입이 막히면 생산과 수출이 동시에 위축될 수밖에 없어서다. 정부가 석유제품의 원활한 내수 유통을 위해 정유사의 수출량을 지난해 같은 기간 물량의 100%로 제한 것도 이런 상황을 부추겼다. 업계 관계자는 "정유사들의 경우 내수보다 수출로 이익을 만들어왔는데 이란 사태로 그 구조가 흔들릴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며 "유가 상승과 정제마진 개선으로 1분기 호실적이 기대되는 것과 별개로 수출이 줄고 있는 것은 그 자체로 악재"라고 분석했다.
각국이 원유 확보에 사활을 걸다 보니 글로벌 시장의 불안은 갈수록 증폭되고 있다. 최대 연료 공급 국가인 한국이 수출량을 줄이면서 미국조차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실제로 미국·일본 등 주요국들은 우리 정부에 석유제품 수출 통제를 자제해달라는 의견을 전달하기도 했다.
이란 사태가 장기화되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종전이 되더라도 글로벌 석유 공급망 회복까지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업계 안팎에서는 중동 산유국의 생산·출하 시설 피해 정도에 따라 회복 시점이 달라질 수 있는데 정상화까지 빠르면 6개월, 길게는 1~2년 이상 걸릴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원유 생산이 중단될 경우 단기간 내 석유제품 수출 회복은 어려워질 수 있다. 원유는 생산 시설 가동이 멈추면 점도가 높아지게 되는데, 이렇게 되면 생산을 재개하는데 시간이 더 걸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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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사들 사이에서는 이미 떨어진 가동률 자체가 부담이라는 지적이 제기된다. 원유 수급 불안 속에 지금보다 정유시설 가동률이 낮아지면 인건비와 설비 유지비 등 고정비 부담이 커지면서 수익성 악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장태훈 에너지경제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중동발 공급 차질로 제품 물량까지 동시에 줄어들면 가격 상승에 따른 수익성 개선 효과도 제한적일 수 있다"며 "제품 단가가 상승하더라도 판매 물량이 줄어들면 전체 수익이 감소하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