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생에너지 팩트체크 플랫폼 리팩트(RE:FACT)
재생에너지를 확대하면 정전이 늘어난다? "대체로 사실 아님"
재생에너지 확대국 32개국 중 53%에서 정전시간 감소
세계 대정전 20건 분석 결과 최대 원인은 인프라 결함

재생에너지를 급속히 늘리면 정전 위험이 커진다는 주장이 대체로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정전의 주된 원인은 전력망 노후화 등 인프라 결함이 대부분인 것으로 파악됐다.
23일 재생에너지 팩트체크 플랫폼 리팩트(RE:FACT)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의 재생에너지 발전량 변화와 같은 기간 정전 시간을 분석한 결과, 재생에너지가 늘어난 국가 중 53%에서 정전시간이 오히려 감소했다.
리팩트는 국제재생에너지기구(IRENA)의 국가별 재생에너지 발전 비중 통계와 세계은행의 계통평균 정전지속시간 지수(SAIDI)에 모두 데이터가 있는 OECD 회원국의 2015~2019년 자료를 기반으로 분석했는데, 이 기간 재생에너지 확대 32개국 가운데 영국, 일본, 프랑스, 헝가리, 에스토니아 등 17개국(53.1%)에선 정전시간이 감소했다.
오히려 정전시간 감소폭이 가장 큰 국가들 중 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이 늘어난 경우가 발견되기도 했다. 슬로베니아는 이 기간 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이 2.46%포인트(p) 증가했는데, OECD 국가 중 같은 기간 정전시간 감소폭(8.85시간↓)이 가장 컸다. 이스라엘 역시 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이 2.65%p 늘었고 정전시간은 1.53시간 줄었다.
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을 크게 늘린 국가들의 정전시간 증가가 미세한 경우도 있었다. 재생에너지를 28.15%p 늘린 리투아니아에선 정전시간이 36초 늘어나는 데에 그쳤고, 재생에너지를 26.18%p 늘린 룩셈부르크에서는 정전시간이 약 11분 증가했다.
반대로 재생에너지 확대국 가운데 정전시간이 늘어난 국가도 있었다. 미국, 아일랜드, 네덜란드, 뉴질랜드, 스페인 등 13개국(40.6%)이다. 정전시간이 가장 크게 늘어난 튀르키예(31.1시간↑)의 경우 재생에너지 비중이 11.56%p 늘어난 곳이었다.
또 한국, 독일 등 2개국은 재생에너지를 각각 2.75%p, 10.48%p 늘렸지만 정전시간엔 변화가 없었다. 재생에너지 확대와 정전시간 증감간 상관관계나 인과관계를 찾기 어렵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정전은 왜 발생했을까. 국제 연구그룹 제로 카본 애널리틱스(ZCA)가 2005년부터 2025년 사이 발생한 전세계 대규모 정전 20건을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11건에서 인프라 결함이 보고됐다. 작동 실수 등 인적 오류(6건), 폭염과 혹한 같은 극한기상현상이나 지진 등 자연재해(5건), 유지 보수 및 업그레이드에 대한 과소 투자(4건)도 원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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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력망 과부하 및 불안정으로 인한 대정전은 2018년 일본 홋카이도, 2019년 영국의 경우가 해당됐다. 2025년 스페인 등 이베리아 반도에서 대정전을 일으킨 원인은 전력망 과부하·불안정 외에 인프라 결함 등 다수의 복합적인 요인이 지목됐다.
ZCA는 "(태양광, 풍력 등) 가변 재생에너지는 종종 최근 이베리아 반도 사건과 관련해 정전 원인으로 잘못 비난 받았다"며 "그러나 대정전은 네트워크 인프라의 실패에 의해 압도적으로 주도된다"고 했다. 일반적으로 정전은 단일 이벤트가 아니라 서로 관련된 여러 조합들에 의해 발생한다는 설명이다.
유럽 송전계통운영자 네트워크(ENTSO-E)가 지난해 이베리아반도 대정전, 이른바 '스페인 정전' 원인을 1년간 분석해 지난 3월 발간한 '2025년 4월 28일 대정전 최종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발생한 정전 역시, 단순히 재생에너지가 전력을 과잉 생산해 전력망이 과부하된 사건으로 보기 어렵다.
당시 정전을 유발한 가장 큰 원인은 '전압상승'이었는데, 이 전압상승을 초개한 원인은 '무효전력 전달 미달' 등을 비롯해 14가지 요인이 맞물린 결과였다.
로이터는 스페인 정전 원인과 관련, 정전 이전부터 스페인 전력 계통에서 전압 변동이 수개월간 반복됐으며 알려진 구조적 취약성에 충분히 대응하지 못한 점이 사고 배경으로 지목됐다고 보도했다.

스페인의 사례는 전력망 불안정이 재생에너지 확대보다 전력망에 대한 투자 부족에서 기인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ZCA가 블룸버그NEF 데이터에 근거해 분석한 바에 따르면, 이베리아 반도의 전력망 관련 자본 지출은 1메가와트시(mwh) 당 15.1달러(USD)로 영국이 25.5달러, 독일과 이탈리아 등 다른 유럽 국가가 20~23달러를 지출하는 데에 비해 현저히 적었다.
ZCA는 "전력망 투자가 2021년 이후 증가하기는 했지만 전기 수요 급증에 비해선 뒤쳐져 있다"며 재생에너지 투자가 2015 년 이후 두 배 이상 증가한 것과 비교해도 전력망 투자는 같은 기간 동안 24%만 증가했다고 지적했다.
스페인의 경우, ENTSO-E의 권고처럼 정전 발생 후 재생에너지를 전력망에 더 안정적으로 통합하는 방향에 후속조치가 맞춰졌다. 재생에너지 발전소에도 기존 화력발전소가 주로 제공하던 동적 전압 제어 서비스를 제공하도록 규정을 바꾼 게 대표적 조치다. 이 외 전력망 혼잡 관리와 출력제어 개선, 기존 재생에너지 설비와 연계한 배터리 저장장치 설치 절차 간소화도 함께 추진됐다.
이 결과 재생에너지 보급은 더 빨라졌다. 스페인은 2025년 4월 이후 매월 1.3GW의 풍력 및 태양광 발전 설비가 추가되었으며, 이는 전년도 평균 1.2GW 대비 증가한 수치다.

이처럼 화석연료에서 재생에너지로의 전원 변화와 함께 인공지능(AI)발 전력수요 급증이 더해지며 송배전망 등 전력 인프라 투자는 급속도로 늘어날 전망이다. 블룸버그NEF는 2024~2050년 전력망 투자 요인 중 재생에너지 발전설비 확충(35%)과 노후 설비 교체(30%)를 양대 동인으로 꼽았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2040년까지 전 세계에서 8000만km 이상의 전력망을 새로 만들거나 교체해야 한다고 추산한다. 또 신규 전력망 건설을 가속하는 동시에, 기존 전력망을 더 효율적으로 활용해 단기간에 추가 접속 용량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고 짚었다.
전력 산업에서 재생에너지가 주류 발전원에 올라선만큼 인프라 역시 재생에너지에 부합하는 형태로 바뀌어야 한다는 진단도 나온다.
2025년 신규 발전설비의 85.6%는 재생에너지였다. 2025년 태양광은 약 511기가와트(GW), 풍력은 약 159GW가 추가돼 각각 역대 최대 신규 설치 기록을 경신했다. 두 발전원 신규설치용량의 합은 전년대비 16.9% 증가했다. 해마다 늘어나는 실규 설비 용량으로 2025년 전 세계 누적 재생에너지 발전설비용량은 5129GW, 전체 발전설비 중 49.4%로 확대됐다.
이 보고서에 검토자로 참여한 전영환 홍익대 전자전기공학부 교수는 "2003년 미국 북부와 캐나다 온타리오 지역에서 일어난 북미대정전, 같은 해 이탈리아-스위스 연계선 차단에 의한 이탈리아 대정전을 비롯해 아르헨티나-우루과이 정전, 인도 대정전 등 거의 매년 전 세계적으로 크고 작은 정전이 발생했다"며 "이들 정전의 이유는 대부분이 전력 인프라 부족이 원인이었다"고 설명했다.
또 전 교수는 "최근 재생에너지가 증가하면서 정전이 발생하면 재생에너지가 원인이지 않을까 하는 의심을 많이 하지만 이번 리팩트 보고서가 밝혔듯 재생에너지가 증가한다고 정전이 증가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이어 "앞으로 재생에너지가 증가하는 상황에서 정전이 발생하는 것은 피할 수 없을 것"이라며 "재생에너지가 증가하면서 달라지는 특성에 대비해 적절한 안정화 대책을 수립해야 전력 공급의 안정화를 기대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한편 오는 24일 오후 2시부터 국회의원회관 제11간담회의실에서 '스페인 대정전 1주년,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를 주제로 국회의원 박지혜 의원실, 에너지전환포럼, 전력거래소가 공동주최하는 토론회가 열린다. 이 자리에서는 ENTSO-E 조사보고서를 바탕으로 스페인·포르투갈 대정전의 경과와 원인을 살펴보고 재생에너지 확대와 계통 안정성을 함께 설계하기 위한 개선 방향을 모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