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신의 와인 Pick!] 이럴 때 이 와인 어때?

[박영신의 와인 Pick!] 이럴 때 이 와인 어때?

로피시엘=박경배 기자
2026.07.11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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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속에 의무와 역할이 무겁게 느껴질 때, '인피니티 소비뇽 블랑 25 (Inviniti Sauvignon Blanc 2025)'

꿀풀/사진제공=필자
꿀풀/사진제공=필자

살아가면서 우리는 원하든 원치 않든 수많은 이름과 역할을 짊어지게 된다. 직장에서의 책임과 가정에서의 의무, 그리고 사회가 요구하는 기대들 속에서 살아가다 보면 어느새 그 이름들이 나 자신보다 더 커져 버리곤 한다. 그러다 문득 마음 한편이 짠해지는 순간이 있다.

"나는 원래 어떤 사람이었지?"

초여름 산책길에 피어난 꿀풀 앞에 쪼그려 앉아 한참을 바라보고 있자니 그 질문이 조용하고도 깊게 내 안으로 스며들었다.

화려한 화단의 주인공도 아니고 꽃집 진열장을 장식하는 꽃도 아니다. 길가에 피어 있어도 대부분은 이름조차 모르고 지나친다. 하지만 꿀풀은 개의치 않는다. 누가 바라보든 말든 자신의 계절이 오면 어김없이 꽃을 피우고 벌과 나비에게 꿀과 쉼터를 내어준다.

사람들의 관심 밖에 있지만 자연은, 그 존재를 잊지 않는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그렇다. 박수를 받을 때보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순간에 묵묵히 더 많은 일을 해내며 살아간다. 그렇게 말없이 곁을 지켜준 시간들은 큰 이슈가 되는 건 아니지만 평범한 하루하루들이 결국엔 삶을 지탱하는 힘이 된다.

그래서 오늘은 남들이 기억하는 나보다 내가 잊고 있던 나를 떠올려본다. 성과보다 마음을 다했던 순간, 평가보다 좋아서 했던 일들, 그리고 바쁘게 살아오며 잠시 잊고 있던 본래의 모습을 말이다.

그런 시간 곁에 자연의 숨결을 담은 와인 한 잔이 잘 어울린다. 사람의 욕심보다 자연의 리듬을 먼저 생각하며 만들어진 와인, 화려한 기교보다 있는 그대로 솔직한 매력을 담아낸 와인이다.

오늘 소개할 와인은 뉴질랜드 말보로에서 온 지속가능 인증을 받은 비건 와인, 인비니티 소비뇽 블랑(Inviniti Sauvignon Blanc)이다.

◆ 인피니티 소비뇽블랑 25(Inviniti Sauvignon Blanc 2025)

-Country : New Zealand

-Region : Marlborough

-Producer : Lawson's Dry Hills

-Grape : Sauvignon Blanc 100%

-Alcohol : 12.5%

-Farming : Sustainable Winegrowing New Zealand Certified · Vegan Certified · Carbon Zero · B Corp Certified

/사진 출처= (주)치코비노인터내셔날
/사진 출처= (주)치코비노인터내셔날

◆ 테이스팅 노트 (Tasting Notes)

-외관 (Appearance): 맑고 투명한 페일 스트로 컬러를 띠며, 가장자리에 은은한 녹색 빛이 감돈다. 가볍게 흐르는 레그는 이 와인의 신선함과 청량한 스타일을 보여준다.

-향 (Nose): 살구, 복숭아의 풍부한 과실 향이 먼저 올라오고 패션프루트와 자몽의 싱그러운 시트러스 향이 뒤따른다. 여기에 깎은 잔디와 덜 익은 토마토, 은은한 피망의 그린 노트가 더해지며 말보로 소비뇽 블랑 특유의 개성을 드러낸다. 부싯돌과 젖은 돌을 연상시키는 미네랄 뉘앙스도 인상적이다.

-팔렛 (Palate): 생기 넘치는 산도가 입안을 상쾌하게 채우며 라임, 구스베리, 청 사과의 신선한 풍미가 주를 이룬다. 열대과일의 풍성한 과실미가 균형을 더하고, 깔끔한 질감과 산뜻한 여운이 매력적이다.

-결론 (Conclusion): 깨끗하고 청량한 피니시가 길게 이어지며, 시트러스의 잔향과 은은한 미네랄리티가 마지막까지 산뜻한 인상을 남긴다.

-총평: 로슨스 드라이 힐스 인비니티 소비뇽 블랑은 말보로 소비뇽 블랑의 전형적인 매력을 충실히 담아낸 와인이다. 지속가능성과 비건 철학을 실천하면서도 품종 특유의 신선한 과실미와 산도를 놓치지 않았다.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가격대에서 기대 이상의 완성도를 보여주는 매력적인 데일리 와인이다.

와인을 마실 때는 백 라벨도 한 번쯤 천천히 읽어보길 권한다. 와인에 담긴 이야기와 철학을 알게 되면, 한 잔의 와인은 단순한 음료가 아니라 더욱 풍성한 경험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 와이너리 이야기 '로슨스 드라이 힐스(Lawson's Dry Hills)'

뉴질랜드 말보로(Marlborough)를 대표하는 로슨스 드라이 힐스(Lawson's Dry Hills)는 말보로가 세계적인 소비뇽 블랑 산지로 자리 잡기 이전부터 이 지역의 가능성을 믿었던 개척자들의 이야기를 품고 있다.

1982년 로스(Ross Lawson)와 바버라 로슨(Barbara Lawson) 부부는 블레넘(Blenheim)의 앨라배마 로드에 첫 포도나무를 심었다. 당시만 해도 말보로는 지금처럼 유명한 와인 산지가 아니었고, 이들은 오랫동안 직접 재배한 포도를 다른 와이너리에 공급하며 토양과 기후를 이해하는 시간을 보냈다. 약 10년의 경험을 쌓은 뒤인 1992년, 마침내 'Lawson's Dry Hills'라는 이름으로 자신들의 첫 와인을 선보이며 독립적인 와이너리의 역사를 시작했다.

'Dry Hills'라는 이름은 와이너리가 자리한 말보로의 건조한 언덕 지형에서 유래했다. 이 지역은 강수량이 적고 일조량이 풍부해 포도나무가 스스로 깊은 뿌리를 내리도록 돕는다. 뿌리는 토양 깊숙이 수분과 미네랄을 찾아 내려가고, 그 과정에서 말보로 특유의 생동감 있는 산도와 선명한 과실 향이 형성된다.

이들이 추구하는 와인의 개성은 화려한 양조 기술보다 떼루아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최대한 있는 그대로 담아내는 것에 가깝다. 오늘날 로슨스 드라이 힐스는 뉴질랜드에서 가장 폭넓은 지속가능성 인증을 받은 와이너리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는다. 포도 재배부터 양조, 병입까지 모든 과정을 자체적으로 관리하며, 물과 에너지 사용량을 줄이고, 재활용이 쉬운 경량 병과 친환경 포장재를 사용하는 등 생산 전 과정에서 환경 부담을 줄이기 위한 노력을 이어가고 있다.

이러한 실천은 Sustainable Winegrowing New Zealand(SWNZ) 인증을 비롯해 ISO 14001 환경경영, Carbon Zero, B Corp 인증으로 이어졌으며, 단순한 친환경 마케팅이 아닌 기업 운영 전반의 철학으로 자리 잡고 있다. 라벨에 새겨진 무한대(∞) 심볼은 자연과 사람, 그리고 다음 세대까지 이어지는 지속가능한 순환을 상징한다. 병은 재활용 유리 비율을 높인 경량 병을 사용하고, 라벨 역시 지속가능한 산림에서 생산된 종이를 적용했다. 와인 양조 과정에서는 동물성 청징제를 사용하지 않은 비건 프렌들리 와인이다.

로슨스 드라이 힐스가 말하는 지속가능성은 단순히 환경을 덜 훼손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좋은 와인은 건강한 토양에서 시작되고, 건강한 토양은 결국 다음 세대에도 이어질 자연을 남기는 일이라는 믿음이 그 중심에 있다. 그래서 인비니티 소비뇽 블랑 한 잔에는 말보로의 청량한 향 뿐 아니라, 자연과 함께 오래 살아가기 위한 와이너리의 철학도 함께 담겨 있다.

◆ 푸드 페어링 (Food Pairing)

비건 아보카도 루꼴라샐러드/사진제공=필자
비건 아보카도 루꼴라샐러드/사진제공=필자

- 일반 페어링: 가리비찜, 새우튀김, 제철 회, 레몬을 곁들인 흰살생선구이 등

- 비건 페어링: 아보카도 루꼴라 샐러드(화이트 발사믹), 양송이 루꼴라파스타, 완두콩 리조토

- 혼술 페어링: 캐러멜라이즈드 토마토에 곁들인 호두 견과

박영신 와인 칼럼니스트
박영신 와인 칼럼니스트

-박영신 와인 칼럼니스트-

"우리는 어떤 의무와 역할을 해내기 위해 바쁘게 살아가지만, 행복이란 소비뇽 블랑처럼 자신의 향을 잃지 않는 데서 오래 머문다."

현 한국와인소비자협회(KWCA) 회장으로, 경희대학교에서 와인소믈리에학 석사와 조리외식경영학 박사를 수료했다. 전 와인바, 전문 와인숍 운영 경험을 바탕으로 소비자 관점에서 와인 시장을 분석하고 소비자 니즈를 정확하게 읽어내는 전문가로 평가받고 있다.

비건 와인 및 와인 소비자 행동과 관련한 연구 논문을 발표했으며, 국내 주요 와인 품평회와 와인 대회의 심사위원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와인 칼럼니스트이자 협회장으로서 올바른 와인 소비문화 정착을 위해 다양한 교육과 콘텐츠를 제공하고 있으며, 생산자·유통자·소비자를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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