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 전 상하이공항에서의 일이다. 귀국 비행기의 지연출발로 인해 나는 공항에서 오랫동안 머물러야 했고, 일행인 여중생 6명과 함께 이런 저런 이야기로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그 때 팝송 'Tears in heaven'이 흘러나왔다.
“얘들아 이 노래 아니?” 들어본 적 없다는 아이들에게 "어린 아들을 사고로 잃은 에릭 클랩튼이 마음 아파하며 만든 노래인데, ‘천국에서 널 만나면 너는 내 이름을 기억할까? 천국에서 만나면 넌 예전과 같은 모습일까? 천국에서 만나면 내 손을 잡아주겠니?’라는 가사로 되어 있어."
이 얘기를 듣던 예은이의 눈가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그렇다. 공감력(empathy)이다. 중2 여학생인 예은이가 공감력을 보인 것이다. 공감은 동정(sympathy)과는 다르다. 동정은 자신의 입장에서 남을 보며 안타까워하는 마음인데 반해, 공감은 그 사람의 마음으로 들어가 그 사람의 입장과 시선으로 사물을 봄으로써 나타나는 마음 현상이며 감정의 변화다. 예은이는 사랑하는 아들을 잃고 슬프게 노래하는 에릭 클랩튼의 마음으로 들어간 것이었다.
1970년 겨울. 폴란드의 바르샤바 전쟁희생자 추모비 앞에 초로의 신사가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린다. 모두가 알다시피 그는 빌리 브란트 독일 총리다. 국내의 비판적 여론에 굴하지 않은 정치지도자의 진심 가득한 사과는 결국 독일을 더 강하게 만들었고, 인류는 야만의 상처를 딛고 진보했다. 한 국가의 정치지도자를 무릎 꿇고 눈물 흘리게 만든 건 인간 본성에 기초한 공감력이었다.
일부 학자들은, 인류의 미래가 그나마 긍정적일 수 있다면 그건 공감력 덕분일 것이라고 말한다. 남의 아픔과 상처를 자기의 것처럼 아파할 줄 아는 능력으로 인해 인류는 진보하게 될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여기 인기 절정의 정치인이 있다. 작은 외조부와 조부가 총리를 지냈고 아버지는 외무상을 지낸 명문가 자제로, 총리가 되자마자 20년간의 경기침체를 한방에 날림으로써 70%대의 지지를 받고 있는 그는 일본 총리인 아베 신조다. 그는 일본의 침략전쟁을 인정하지 않는다. 당연한 결과로서 피해자들에 대해 미안한 마음이 있을 리 없다.
위안부는 돈벌이를 위해 매춘을 택했던 사람들이고, 침략도 학술적인 정의가 없으니 인정하기 힘들단다. 한국과 중국인들에겐 숫자 자체만으로도 악몽이 되는 731이 선명히 찍힌 전투기를 타고 엄지손가락을 내민다. 사실상 야당 당수로 차세대 지도자로 꼽히는 하시모토 도루 오사카 시장은 “총탄이 오가는 전쟁상태에서는 극도의 흥분상태에 있는 군인들에게 위안부 제도는 필요하다”고 말한다. 나는 본능적으로 묻는다 “그럼 당신 딸을 위안부로 보내면 어떠한가?” 공감력은 역지사지하는 마음부터 비롯되니 말이다.
잠시 생각해보자. 누군가의 가난한 딸이 전쟁터에서 매일 수십 명을 성적으로 상대하며 짐승보다 못한 삶을 살아야 했고, 내 살점보다 더 소중한 아들의 육신이 생체실험의 도구로 사용되어 너덜거리게 되었다면, 그러한 광기의 역사 속에 삶을 송두리째 빼앗겨야 했던 사람들 앞에서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무엇일까?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예의는 또 무엇일까? 반성과 교훈은 그 다음의 문제다. 아마도 중학생 예은이라면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을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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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일본 정치인들의 망언에 대해 크게 분노하지는 않는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사자 한 마리가 이끄는 양 무리는 양 한 마리가 이끄는 사자 무리를 이긴다고 했다. 그게 바로 리더의 힘이며 중요성이다. 천박한 역사의식을 가진 리더로 인한 최대 피해자는 일본 국민들이 될 것이며 역사가 이를 확인할 것이라 나는 믿는다. 따라서 정작 분노해야 할 사람은 우리가 아니라 미래를 빼앗길 일본 국민이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둘째, "진실로 가치 있는 것에 집중하고 무가치한 것을 무시하는 것이야 말로 올바른 삶에 이르는 길”이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했다.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철학과 공감력이 부재한 정치인들이 쏟아내는 일고의 가치조차 없는 언행에 내가 반응하거나 분노하는 것은 내 삶을 소모시킬 뿐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정작 우리가 관심을 갖고 돌아보아야 할 가치 있는 일은 “우리들은 어떠한가?”이다. 우리는 가난한 나라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에 대해, 사회적 약자에 대해, 장애인에 대해 공감하고 있는가? 어린 시절부터 집에서, 학교에서 공감력이 길러지고 있는가? 아마 그랬다면 라면을 덜 익혔다고 우리의 똑똑한 딸이 수모를 겪거나 우리의 고단한 아버지가 장지갑으로 맞거나, 먼 곳의 우리의 딸이 호텔에서 울면서 고국의 고위 관료를 고발해야하는 비극은 없었을 게다.
암기와 경쟁이 일상화 된 교육은 인성과 공감력을 키울 수 있는 형태로 바뀌어야 한다. 그럴 때만이 대한민국은 진정한 국력을 갖춘 존경 받는 국가가 될 것이며, 이는 개콘보다 더 나를 웃게 만드는 일본의 일부 극우 정치인들로부터 배우는 반면교사의 교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