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사회적 자본 없이 창조경제를 만들 수 없는 이유

나는 지난 7월초부터 이 달 말까지 안식년 휴가를 보냈다. 7년 전 회사 설립 당시에 생각했던 안식년 아이디어를 실천에 옮긴 것이다. 이 기간 중에 무엇을 할까 장고 끝에 두 가지를 결정했다. 우선 오래전부터 가고 싶었던 노르웨이 피요르드(Fjord) 해안을 가는 것, 둘째는 조지프 스티글리치의 역작, ‘불평등의 대가’를 정독하는 것이 그것이었다.
노르웨이 피요르드는 기대 이상이었다. 물가가 비싼 것을 제외하면 여행지로서 흠잡을 때가 없었다. 어딜 가나 사진기를 갖다 대면 한 폭의 그림들이 담긴다. 사람들은 친절했고 마을과 도시는 평화로웠다. 부러움과 시새움이 턱 밑까지 차올랐다.
그리고 그 부러움은 알레순(Alesund)라는 도시에서 작은 사건을 경험하면서 정점을 찍었다. 7월 어느 날 오전 나는 북유럽의 베니스라 불리는 알레순에 도착했다. 그 곳에 도착하자마자 실내장식 소품가게에 들렀다. 마침 쇼핑할 만한 물건이 눈에 띄었으나 제법 무거워 저녁까지 들고 다니기엔 짐이 될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난 가게 점원에게 의례적으로 다시 들리겠노라고 말하곤 무심코 상점을 빠져 나왔다.
그리곤 알레순 거리를 헤매고 다녔다. 이미 난 그 점원에게 한 말조차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아니 다시 그 상점을 찾아가고 싶어도 낯선 이국의 골목들은 미로와도 같아 거의 불가능했다. 그런데 저녁 무렵 도시를 돌고 돌다 우연히 그 상점거리로 다시 오게 됐고, 난 아침에 그냥 지나치듯 "다시 오겠노라"고 한 말이 불현듯 떠올라 그 상점엘 다시 들렀다. 그런데 그 점원은 반기듯 나를 보더니 이미 포장해놓은 그 물건을 건네는 것이 아닌가. 폐점시간이 지났음에도 나를 기다렸다는 말과 함께. 북유럽표 사회적 자본을 만난 것이다.
스티글리치의 ‘불평등의 대가’는 공감 가는 부분들이 많았다. 그 중에서도 “번영을 이룬 경제는 신뢰를 최고로 여기기 때문에 한 번의 악수로 거래가 이뤄지는 경제다(239쪽)”, “신뢰가 없으면 거래의 양 당사자는 상대방이 언제 배신할지 알아내는 일들에 공을 들인다. 그리고 배신에 대비한 보험과도 같은 일들을 마련한다(240쪽)”라는 대목에서 내 시선이 오래 머물렀다. 또한 경제사학자인 맥클로스키(McCloskey)와 모키르(Mokyr)의 “영국 산업혁명은 당시 기회주의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회규범 덕분에 성공할 수 있었다(539쪽)”는 주장에도 공감했다.
나는 이번 휴가기간 중 앞서의 경험과 스티글리츠의 저서를 통해 흔히 '신뢰'라 불리는 '사회적 자본'과 만났다. 만남의 결과 “신뢰와 기회주의는 ‘부의 관계’를 갖는다”라는 나름의 가설을 세울 수 있었다. 언뜻 신뢰와 기회주의는 별 상관이 없어 보이지만 양자는 동전의 양면을 구성한다. 즉 구속력이 있든 없든 숙고 후 이뤄진 약속에 대해 단기적 유·불리를 떠나 지켜주는 것이 바로 신뢰이며 사회적 자본인 까닭이다. 기실 ‘한 번의 악수’는 아무런 구속력이 없다. 그것은 그냥 친근함을 주고받는 의례적 몸짓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소소한 몸짓에도 책임지는 자세들이 축적되면 흡사 티끌모아 태산이 되듯 국민경제 전체의 사회적 자본이 축적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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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사회적 자본 수준이 매우 낮다. 나는 그 근본적 이유를 ‘단기이익의 과도한 추구’에서 찾는다. 단기이익을 쫒아 부유하는 사회에서는 기회주의가 득세하게 마련이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확실한 현재의 현금(Cash)을 위해 불확실한 미래의 신뢰(Credit)는 헌신짝처럼 내버려지기 일쑤다. 이렇게 신뢰가 쌓이지 못하니 사업가들은 폭탄주를 돌리며 “우리가 남이가”를 연호하지 않을 수 없다. 함께 망가지는 이러한 행위는 배신을 막기 위한 일종의 보험성격을 띤다.
이야기를 바꿔 글을 맺는다. 최근 들어 창조경제라는 말이 유행어로 등장했다. 그 개념논쟁도 아직 현재진행형이나 확실한 것은 '사회적 자본의 축적 없이 창조경제는 없다'는 점이다. 창조경제가 발흥하려면 상대를 신뢰하는 효과적인 협업의 인자를 필요로 한다. 이러한 협력의 토대 위에서 다양한 전문성들이 융복합적 생산성을 창출하는 것이다. 또한 신뢰 속에서 자유시장 경제의 효율성을 담보하는 법치주의가 구축될 수 있다. 우리 모두 창조경제를 운위하기 이전에 영국 산업혁명 당시, 신뢰가 그 사회 최우선 규범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직시하는 것이 먼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