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변심이 남긴 자리

[기고] 변심이 남긴 자리

이항우 충북대 사회학과 교수
2014.04.01 05:34

사람은 누구나 변심한다. 나이가 들고 주변 자극을 받으며 시나브로 마음이 바뀐다. 인생사의 당연한 이치다. 연인 혹은 동지 간의 변심은 때때로 극단을 넘나든다. 하지만 대개 그럴만한 혹은 그럴 수도 있는 것으로 이해받고 수용된다. 모두들 그렇게 산다. 그래서 떠난 사람에게 떠난 자리는 잘 보이지 않는다. 변심이 불가피했노라는 사람에게는 더욱 그렇다. 변심이 수반한 고통이 한때 아무리 컸을지라도.

반면, 떠나보낸 사람에게 그 자리는 확연하다. 변심이 그럴만하고 그럴 수 있고 심지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임을 수없이 되뇌어도 달라지지 않는다. 뜻을 같이 하고, 미래를 함께 가꾸고, 고난의 길을 동행했던 관계에서 변심이 초래하는 상실감은 결코 작은 것일 수가 없다. 떠난 사람이 그것을 헤아리기가 쉽지 않을 따름이다. 자신이 떠난 자리가 비로소 눈에 들어오고 황망함과 당혹감에 마음이 흔들릴 때는 언제일까.

'길을 걸었지/누군가 옆에 있다고/느꼈을 땐/나는 알아버렸네/이미 그대 떠난 후라는 걸/나는 혼자 걷고 있던 거지/갑자기 바람이 차가워지네.'

고인이 된 박은지 노동당 부대표. 그의 자살이 우리를 이끄는 곳은 바로 이 변심의 맥락이다. 그가 뜨겁게 붙들다 하릴없이 놓아버린 현실은 우리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그는 왜 스스로 생을 마감했고 우리는 왜 남아 있는가.

교사의 꿈을 안고 사범대에 진학한 것은 총명한 여느 여고생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사회의 부정과 부패에 분노하고 저항하는 패기는 사회가 대학생에게 기대하는 참모습 중 하나가 아닐까. 백 통에 가까운 이력서로도 회사 문을 잘 열지 못하는 상황은 오늘날 대다수 청년이 감당하는 고통의 진원이다. 이 땅에서 임신한 임시직 여성의 모성을 보호해주는 직장은 없다는 것도 노동의 현실이다. 평생을 학원 강사로 살 것인가라는 질문은 적지 않은 청춘이 씨름하고 나름의 답을 구했을 법한 유사한 문제들과 얼마나 다를까.

박은지는 이 모든 현실에 맞서 싸웠다. 그냥 개인으로가 아니라 진보정당의 일원으로서 사회적 약자의 권리를 찾는 거의 모든 집단적 사회적 실천에 열정적으로 참여했다. 이 모습은 1980년대의 청년들에게 그다지 낯선 모습이 아니다. 그래서 일면식도 없는 그의 죽음 앞에서, 옛날의 젊은이들은 자신들의 변심이 남긴 자리를 보게 된다. 우리의 정치 환경이 이토록 척박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아마 젊고 유망한 진보 정치인으로서 더 많은 격려와 지지를 받았을 지도 모른다.

숙명과도 같은 가난, 주위의 차가운 시선, 진보정치의 전망 부재 등이 그의 우울증을 키웠을 것이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변심한 우리가 그의 이념, 세계관, 삶의 방법 등에 관하여 떠들 입장이 못 된다. 아무리 변심이 정당하고 변화된 시대의 요구였다고 자위하더라도 말이다. 떠난 우리도 여전히 우울하기 때문이다. 생계를 옥죄는 고용불안, 아이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끝없는 경쟁 교육, 만인에게 평등하지 않은 법률, 거짓과 기만의 성벽을 쌓는 권력, 불법과 부정으로 얼룩진 정치를 매일같이 대하는 우리는 모두 우울해지지 않을 수 없다. 돈과 권력과 위신의 속물적 논리에 점점 더 빠져드는 자신의 모습에 우울해지지 않을 수 없다.

영화 <그을린 사랑(incendies)>에서 여 주인공 나왈 마르완은 자신의 주검을 얼굴이 땅을 향하도록 엎어서 매장하라는 유언을 남긴다. 내전으로 개인의 인륜이 끔찍하게 파괴되는 세상을 죽어서도 더는 보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죽어서도 등지겠다는 것이었다. 혼자 남게 될 아들, 자신의 죽음을 맨 먼저 알게 될 아들, 이 모든 것을 알고도 가버린 그의 마음이 나왈의 마음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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