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자는 4월 남아공 케이프타운에서 개최된 ‘2015 아프리카 젠더서밋 5(Gender Summit 5 Africa)’에 기조연설자로 참석해 ‘젠더 관점에서 창조경제로의 전환(Transition to the Creative Economy : Gender Perspective)’이란 제목으로 발표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창조경제는 우리 시대가 가진 불평등, 저성장, 지속가능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등장했다. 이는 국민들의 창의성을 바탕으로 신시장과 신산업을 창출해야 실현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젠더혁신은 여성 잠재력 활용, 조직의 창의성 증대, 무엇보다 과학기술 분야에서 새로운 지식과 시장의 창출이 가능한 중요한 정책 대상이다.”
세계 각지에서 온 과학기술 분야 리더들은 이러한 내용에 크게 공감했다. 이같은 호응을 통해 창조경제 달성을 위한 혁신전략으로 젠더혁신을 우리 과학기술계가 더욱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는 점을 실감했다.
젠더서밋은 ‘평등을 통한 더 나은 과학과 혁신(Quality Research and Innovation through Equality)’이라는 주제로 2011년 유럽집행위원회(EC)를 중심으로 조직, 진행되고 있는 행사다. 특히 전 세계 과학기술계의 관심을 반영해 ‘젠더혁신(Gendered Innovations)’ 논의를 활발히 진행시키고 있다.
젠더혁신이란 개인과 문화, 과학, 공학의 영역에서 젠더 편견을 제거함으로써 과학기술 및 사회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혁신을 의미한다. 최근 본격적으로 젠더혁신이 글로벌 과학기술계에서 화두로 떠오른 이유는 뭘까. 연구개발을 담당하는 주체로서 여성의 참여를 확대하는 것뿐만 아니라, 젠더에 대한 고려가 연구 결과물의 효용성과 경제적 가치를 높이는 데 기여한다는 점을 인식하게 됐기 때문이다.
1997년부터 2000년까지 미국에서 시판되던 약품 10종이 퇴출됐는데, 이 가운데 8종이 남성보다 여성에게 더 큰 부작용을 유발한 것으로 나타났다. 주요 원인은 해당 약품의 동물 및 임상실험 시 임신 등에 의해 실험통제가 어려운 암컷 혹은 여성을 배제하고 관리가 편한 수컷 혹은 남성만을 활용했기 때문이다.
IT 분야에서도 관련 사례를 찾을 수 있다. 많은 게임개발 업체들은 어린 여자아이들이 예쁜 공주가 나오는 여성스러운 게임을 좋아할 것으로 생각하지만, 오히려 퍼즐이나 시뮬레이션 게임을 좋아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최근 스마트 디바이스의 필수 기능인 음성인식 소프트웨어도 개발단계에서 주로 남성 피실험자 중심으로 테스트가 이뤄져 여성 사용자들의 음성인식에 오류가 많은 것으로 밝혀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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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에 볼보의 콘셉트카 YCC(Your Concept Car), LG전자의 포토포켓 헬로키티 에디션 등 여성의 신체구조와 감성 등을 고려한 제품들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사실 여성인권과 평등에 대한 논의가 꽤 오랜 기간 동안 이루어졌음을 생각해볼 때 과학기술 분야에서 최근 젠더관련 이슈가 논의되고 있는 것은 늦은 감이 없지 않다.
현재 세계 여성정책의 핵심전략은 과거 ‘여성발전(Women in Development)’, ‘젠더개발(Gender and Development)’ 전략을 발전시켜 1995년 제4차 UN 베이징 세계여성대회에서 결의한 ‘성 주류화(Gender-Mainstreaming) 전략’으로 나아가고 있다. 모든 정책 결정과정에 여성의 참여를 보장하는 것은 물론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고려, 평등하게 수립되어야 한다는 내용이 핵심이다. 이같은 정책전략은 경제, 사회, 과학기술 등 모든 영역에서 양성평등 달성을 위한 정책의 근간으로 자리 잡고 있다. 특히 올해는 제4차 베이징 세계여성대회 20주년이 되는 해로 UN은 그간 양성평등의 성과와 과제를 공유하고 새로운 20년의 준비과정으로 ‘베이징 +20’ 캠페인을 시작했다.
우리나라도 이러한 세계적 조류에 부응해 적지 않은 제도적 노력을 하고 있다. 1995년 여성발전기본법을 제정했고, 20년이 지난 올해 7월 1일에는 여성과 남성의 동반성장을 위한 양성평등기본법이 시행됐다. 이뿐만 아니라 2011년에는 성별영향분석평가법을 재정하고 이를 기반으로 ‘성별영향분석평가제도’, ‘성인지예산제도’, ‘성인지통계’ 등 정책 도구들도 갖췄다.
그러나 정책 실천에서는 여전히 여성을 발전의 수혜자로 생각하는 1970년대의 ‘여성발전전략’에 머무르고 있다. 특히 과학기술 분야가 가장 심한 듯하다.
현재 과학기술 분야 여성정책은 2002년 제정한 ‘여성과학기술인 육성 및 지원에 관한 법률’을 기반으로 5년 마다 ‘여성과학기술인 육성·지원 기본계획’을 수립해 추진하고 있다. 특히 제3차 계획이 실행되고 있음에도 ‘어떤’ 연구가 수행되고 있으며, 그 결과물이 ‘누구를’ 위해 사용되는지는 간과한 채 여성 과학기술 인력의 능력향상과 연구개발에 대한 여성 연구원 비율 향상이 내용의 주를 이루고 있다.
미국 자동차 왕 헨리 포드(Henry Ford)는 “모이면 시작이고, 함께 있으면 진보이며, 함께 일하는 것은 성공(Coming together is a beginning; keeping together is progress; working together is success)”이라는 말을 남겼다. 젠더혁신의 인식 확산을 넘어 본격적인 과학기술분야의 실천방안을 마련해야 할 우리의 시점에 가장 적합한 표현이 아닐까 싶다.
[본 기사는 테크엠(테크M) 2015년 8월호 기사입니다. 더 자세한 내용은 매거진과테크M 웹사이트(www.techm.kr)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