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 제약사 임원과의 점심 식사에서 그 임원은 내내 정부를 원망했다. 정부가 제약·바이오 산업을 육성한다면서도 업계를 지원할 생각은 안 한다는 주장이었다.
한 예로 2012년 약가 일괄인하를 들었다. 당시 정부는 제약사들이 병원과 약국에 리베이트를 건네는 데 이는 약가에 거품이 있기 때문이라고 간주하고 가격을 일괄적으로 인하했다. 이 후에도 정부는 실거래가 조사 등을 통해 약값을 내리는데 혈안이 됐다고 그 임원은 핏대를 세웠다. 약값을 인위적으로 인하하는 바람에 연구개발(R&D)에 투자할 여력이 없어 글로벌 제약사 탄생을 기대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임원에게 물었다. '건강보험료를 더 낼 용의가 있느냐'고. 잠시 말이 없던 임원에게 돌아온 대답은 '글쎄요'였다.
약가 우대를 해주는 건 어렵지 않다. 건강보험료에서 그만큼 지출을 많이 하면 그만이다. 그러려면 건보료를 올려야 한다. 제약사 직원들이 약가 우대를 주장하다가도 건보료 얘기만 나오면 머쓱해지는 건 애사심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이 주장의 이면에는 건보재정에 대한 국고 지원을 확대해야 한다는 의도가 숨어 있다.
국민은 묻는다. 국민으로부터 건보료를 더 올려 받아서라도, 더 나아가 재정을 지원해서라도 제약산업을 키워야 할 이유가 있는가?
대답은 정부 몫이다. 국민부담을 감수하더라도 특정 산업을 키워야 할지, 그래서 국민에게 돌아올 혜택은 얼마나 될지, 나라 살림을 책임지는 정부가 고민해야 할 영역이다.
최근 제약사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간 건 타 산업의 부진도 영향을 미쳤다. 적자를 견디지 못한 대형 조선사들이 수천명씩 감원하고, 한진해운·현대상선은 채권단에 명운을 맡겼다. 세계를 주름잡던 전자산업과 차·화·정(자동차·화학·정유)은 중국의 맹추격에 노출됐다.
이런 가운데 한미약품은 지난해 8조원 기술수출 대박신화를 썼고 셀트리온이 바이오시밀러 램시마로 미국의 20조원 시장을 공략한다는 소식은 '제약·바이오 산업이 대한민국을 살릴 새로운 성장동력'이라는 논리로 발전했다.
분명한 건 제약·바이오의 약진이 두드러지지만 무너지는 조선과 해운 등 기존 산업을 대체하기는 아직 역부족이라는 점이다. 국내 제약업계 전체 매출이 20조원이 채 되지 않는다. 한진해운이 멀쩡하던 시절(2010년) 매출이 10조원이었다. 같은 시기 현대중공업 매출은 45조원이었다. 대형차 에쿠스 판매가 주춤했다고 경차 모닝이 대체할 수는 없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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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점에서 매년 7조원의 세금이 지원되는 건보재정을 고려하지 않고 약가를 높여야 한다는 제약사들의 주장은 씁쓸하다. 119년 한국 제약역사상 장사가 안돼 문을 닫은 제약사가 극소수라는 건 의미하는 바가 작지 않다. 다수의 제약사가 합종연횡을 통해 자본력과 연구개발능력을 끌어올리겠다는 소식 역시 듣지 못했다.
이제 피어나기 시작한 제약·바이오 산업을 방치 해서도 안 되겠지만 고령화 사회에 위기로 치닫는 건보재정은 당장 해결해야 할 중대 과제다. 기획재정부는 재정지원을 중단하면 2018년 건보재정은 7조4444억원 적자가 발생하고 2019년에는 적자 규모가 8조원대로 커질 것으로 봤다. 건보료를 더 내든, 세금으로 벌충을 하든 모두 국민 호주머니에서 나갈 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