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의 변명’을 보면, 소크라테스는 청년을 선동한 혐의로 재판을 받고 결국 죽음에 이른다. 죽기 전 그가 남긴 마지막 유언은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닭 한 마리를 빚졌다”였다.
병을 고쳐 준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에게 감사의 예물로 닭을 바치는 행위는 고통으로부터 완전한 해방과 치유를 암시하는 상징이었다. 아니, 무지와 편견이라는 병을 이겨내라고 대중에게 던지는 강력한 처방이었을지도 모른다.
후대 사람들은 잘못된 판결에도 희생과 감사, 배려의 가치를 잊지 않은 소크라테스를 성인(聖人)으로 받들며 그 사상을 오랫동안 간직했다. 얼마 전 박근혜 대통령 변호인단의 서석구 변호사가 박 대통령을 군중재판의 희생양이라며 예수와 소크라테스 등에 비유했다.
최순실이라는 평범한 강남 아줌마를 위해 비정상적으로 국정 운영이 이뤄졌다는 각종 정황과 증거가 속출하고 있는데도, 변호인단은 ‘성인’이라는 상황에 맞지 않는 이상한 비유까지 들먹이며 반격에 나섰다. 박 대통령과 ‘의식과 경제 공동체’로 불리는 최순실은 법정에서 한술 더 떴다.
귀국하자마자 ‘죽을죄’라며 딱 한 번 고개 숙인 최순실은 16일 헌법재판소 공개변론에서 ‘모른다’로 일관했다. 그 “모른다”가 130여 차례나 이어졌다. “어제 일도 기억이 안난다” 등 상식적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부정의 답변은 80차례를 넘겼다.
핍박은 다수의 무지, 또는 마녀사냥 같은 일방적 죽이기로 탄생하는 경향을 부인하기 어렵다. 지금 이 상황이 그런가. 최고 권력자의 꼭꼭 숨겨 둔 민낯이 ‘의식 공동체’와 함께 드러날 때, 촛불 민심도 함께 타올랐다.
그것은 단순히 권력 남용과 비리에 대한 반감으로 싹튼 감정적 대응이 아니다. 진심으로 뉘우치지 않는 진정성 부재에 따른 비정상적 태도, 상식과 정의를 원천 봉쇄하려는 가진 자의 횡포에 대한 항거다. 촛불 민심이 갈수록 혁명적 기운으로 진화하는 것도 그들이 저지른 ‘행위’보다 그들이 감추는 ‘태도’에 기인하는 측면이 크다.
지금의 최순실은 ‘부정’이라는 비양심적 재료로 ‘뻔뻔함’이라는 양념을 섞어 ‘핍박자의 얼굴’로 ‘성인’인 척하고 있다. 대통령을 ‘성인’ 같은 이미지로 극대화하려면 ‘뻔뻔한 거짓말’ 외에 별다른 해법을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일관되게 끝까지 우기는 것만이 김기춘, 우병우, 조윤선 등의 ‘모르쇠’ 원칙을 등에 업고 생존의 마지막 열쇠를 찾는 길일지 모른다.
독자들의 PICK!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오랫동안 이어지는 동안 통치자의 힘을 새삼 실감했다. 최순실도 그랬을 것이다. 법정 중 가장 엄숙하고 권위 있는 헌법재판소에서 보여준 최순실의 안하무인 태도는 아직도 권력이 유효하다고 믿는 통치자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성인은 핍박에 희생으로 보답하지만, 삐뚤어진 권력자 또는 권력 기생자는 핍박이라고 포장한 부정에 뻔뻔함으로 대응할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