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보세]코로나19와 '강제적 워라밸'

[우보세]코로나19와 '강제적 워라밸'

김지산 기자
2020.04.09 04:31
[편집자주] 뉴스현장에는 희로애락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기사로 쓰기에 쉽지 않은 것도 있고,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할 일도 많습니다. ‘우리들이 보는 세상(우보세)’은 머니투데이 시니어 기자들이 속보 기사에서 자칫 놓치기 쉬운 ‘뉴스 속의 뉴스’, ‘뉴스 속의 스토리’를 전하는 코너 입니다.

며칠 전 금융권 노사가 특별연장근로제와 유연근무제를 한시적으로 도입하기로 합의했다. 코로나19 사태로 피해를 입은 소상공인과 중소기업에 대한 금융지원을 보다 빠르게 처리하기 위해서다. 간단히 말해 낮에 장사하고 저녁에 대출을 받거나 환전을 해야 하는 이들을 위해 영업점을 가능한 늦게까지 운영하는 데 노사가 뜻을 모았다는 말이다. 주 52시간에서 비롯된 결과다.

출근 시간은 뻔한 데 밤 늦은 시각까지 소상공인들을 상대하다가는 자칫하면 주 52시간을 위반할 수 있다. 이 부작용을 걷어내자고 고안된 게 유연근무제다. 희망자에 한해 일찍 혹은 늦게 출근하고 그에 맞춰 퇴근 시간도 조절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유연근무제는 특수 부서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금융사들이 시행하지 못하고 있다. 노조 반대 때문이다.

노조 생각은 이렇다. 아침 9시 출근해서 퇴근 시간인 6시 이후 추가 근무를 하면 초과 근무 시간을 합산해 휴가를 쓰거나 수당을 받을 수 있다. 그런데 유연근로제를 하면 이게 사라진다. 연말정산 때 받아보는 1년 소득총액이 연간 성적표와 다름 없는 월급쟁이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다. 이런 불만 요소가 있으니 노조가 선뜻 동의하기 쉽지 않았을 법하다.

그러나 세상은 이미 변하기 시작했다. 잡코리아가 최근 남녀직장인 1084명에게 설문조사한 결과 ‘별(임원)’을 달고 싶다는 직장인은 34.7%였다. 2017년 41.1%에서 6.4%포인트 낮아진 수치다. ‘출세’보다 퇴근 이후 ‘저녁이 있는 삶’이 더 소중하다고 느끼는 직장인들이 늘고 있다는 걸 드러낸다.

코로나19 이후 ‘워라밸(일과 생활의 조화)’에 대한 사회적 논의는 더욱 활성화될 것으로 보인다. 비자발적인 재택근무가 늘면서 가정과 일터와의 경계가 무너지고 가사와 근로의 병행이 시작됐다. 정부와 금융회사, 또는 기업을 막론하고 이같은 현상은 전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의도하지 않게 거대한 실험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거래 상대방의 부도 같은 외부 변수만 제거한다면 실험 결과는 오래지 않아 도출될 것이다. 조직이 내는 성과가 과거와 큰 차이가 없다면 코로나19가 이후 근무 형태 혁신은 보다 깊이 있게 얘기되고 실행될 가능성이 높다. 특히 기업의 경우 근무 공간 확보에서부터 각종 소모품 등 투자비, 고정비를 줄일 수 있다면 경영주들의 선택지는 자명하다.

그렇잖아도 비대면 금융은 대세로 굳혀가고 여러 사람이 신용정보를 분석하고 채권 추심에 매달려야 했던 일을 AI(인공지능)는 관상만 보고도 미래 금융사기범을 추려내는 세상이다(실제 웰스파고, HSBC는 상당한 효과를 거뒀다).

정부는 인류사적 변화를 반영한 정책을 생산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강제적 워라밸’은 어떤 형태로든 남성의 육아, 가사 참여도를 높이는 장치로 작용할 공산이 크다. 저출산 해결의 실마리를 풀 수 있다는 뜻이다.

2010년 기획재정부는 ‘세계주요 국가 저출산 대책 평가 및 우리나라에의 적용 방안’ 연구용역 보고서에서 남성들의 낮은 가사 돌봄 참여도와 낮은 육아 휴직 사용은 재정을 아무리 퍼부어도 출산율을 높이는 데 한계가 있다고 결론 내렸다. 현대 여성은 사회적으로 성공하려는 욕구가 강하며 이를 충족하지 못할 경우 결혼과 출산을 포기한다는 게 서구 유럽의 경험이었다. 재정 지출에만 의지한 독일과 일본은 저출산 극복에 실패한 반면 남녀 역할에 대한 근본적 변화에 도전한 프랑스, 스웨덴은 성공했다.

원하든 원치 않든 거대한 변화는 시작됐다. 순응자와 불응자, 적응자와 부적응자가 선명하게 갈릴 것이다. 코로나19는 그저 이 시점을 앞당겼을 뿐이다. 정부도 기업도 노조도 이젠 이 거대한 흐름을 비켜갈 수 없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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