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관련 자본시장법 위반 등의 혐의로 수사를 받고 있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 대한 구속영장이 지난 9일 새벽 기각됐다.
그 사흘 후인 12일 윤석열 검찰총장은 이 부회장 변호인 측에서 신청한 검찰수사심의위원회(이하 심의위)의 소집을 결정했다.
이 결정 이후부터 검찰수사심의위원장인 양창수 전 대법관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양 위원장이 2009년 에버랜드 전환사채(CB) 저가발행과 관련해 무죄판결을 내리는데 큰 역할을 했다며 심의위원장직에서 물러나는 게 옳다는 보도가 쏟아졌다.
사실 그가 심의위원장이 된 건 이 사건과 무관한 2018년의 일이다. 그의 심의위원장 자리가 부도덕해 보이면 주임검사가 기피신청을 하는 절차가 있다. 하지만 이미 여론전을 통해 심의위가 열리기도 전에 심의위의 공정성은 훼손됐다. 이 사건을 맡은 검찰 수사팀은 이 논란 이후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아도 될 명분이 생긴 셈이다.
여론재판에서 언론이 미치는 영향력을 여실히 보여준 대목이다. 실제 양 위원장은 자신의 도덕성과는 무관하게 여론전에서 타격을 입었다. 이외에도 ‘단독’이라는 이름을 단 ‘유죄추정’의 보도들로 변호인 측에서 호소문을 낼 정도로 여론전이 치열하다.
이처럼 ‘공정한 재판 vs 언론의 자유’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오랜 동안 논란이 돼온 이슈다.
우리 헌법 제27조 3항은 ‘형사피고인은 상당한 이유가 없는 한 지체없이 공개재판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고 돼 있는데, 이는 피고의 입장에서 국가권력으로부터 공정한 재판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 헌법 21조의 ‘국민의 알권리’에도 불구하고, 방송금지 가처분 신청 등 재판을 통해 언론의 보도를 제한하는 것도 위헌이 아니라는 헌법재판소의 판결도 있다.
미국도 마찬가지로 수정헌법 1조(언론의 자유)와 수정헌법 6조(피고인의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 사이의 논쟁이 끊이지 않았다. 최대한 언론의 자유를 인정하되 재판에서 공정한 재판을 받을 수 있는 권리를 위해선 언론의 자유를 제한할 수도 있다고 봤다. 언론의 과도한 취재경쟁이나 선정적 보도경쟁, 혹은 이념적 접근으로 인한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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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심원 제도를 운영하는 미국의 경우 재판 전 언론보도는 공정한 배심원에 의한 재판받을 피고인의 권리를 위태롭게 한다는 데 인식을 같이 하고 있다.
미국 네브레스카의 어느 작은 마을에서 일가족을 살해한 혐의로 기소된 피고인에 대해 언론보도를 금지한 적이 있다.(여론과 법-정의의 다툼 p 195, 켄들 코피 저, 권오창 역, 커뮤니케이션북스)
당시 법원은 이 판결 이후 “권리장전의 제정자들은 수정헌법 제1조와 6조 사이에 순서를 매겨놓지 않았다”며, 언론의 자유가 반드시 형사절차에서 피고인의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에 앞선다고 보지 않았음을 강조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TV 시리즈물과 영화로 만들어진 ‘도망자’의 실제 사건이기도 했던 의사 샘 셰퍼드의 판결은 언론의 휘몰아치듯 확인되지 않은 광폭한 보도가 어떤 폐해를 낳는지를 보여준 대표적 사례다.
샘 셰퍼드 박사가 1954년 7월 임신한 아내 마릴린을 폭행해 살해한 혐의로 기소돼 10년간 복역하던 중 연방 대법원에서 언론의 과도한 보도(거짓말탐지기 조사거부, 불륜, 배심원에 대한 보도)로 인해 너무 알려진 나머지 ‘공정한 재판을 받을 수 있는 권리를 상실했다’는 이유로 1966년 재심에서 ‘유죄 아님(not guilty)’ 판결로 석방됐다.
셰퍼드는 석방 후 4년간 무죄를 주장하다가 사망했지만, 사건 후 43년만인 지난 1997년 그의 아들 샘 리스 셰퍼드는 집안에 드나들던 일꾼 리처드 에벌링이 진범임을 살해 현장의 DNA를 통해 밝혀내고, 진술까지 확보한 바 있다.
미국 법원은 재판을 지배한 여론과 보도의 광적인 분위기를 방지하기 위해 ‘셰퍼드 vs 맥스웰’ 판결에서는 △재판장소를 옮기고, △여론의 분위기가 가라앉을 때까지 재판을 연기하거나, △유죄 무죄 심증의 배심원을 배제하고, △법정안의 증거로만 결정하겠다는 서약을 받도록 했다. 여론에 휩쓸리지 않는 재판만이 진실을 가르는 열쇠가 될 것이라는 신념에서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관련 재판은 그동안 수많은 확인되지 않은 보도를 통해 ‘경영권 승계를 목적으로 부당한 청탁을 통해 합병을 성사시켰다’는 프레임이 완성돼 있다. 어떤 입증도 하기 전에 여론의 법정에서는 이미 운동장이 기울어져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