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말에 보기 좋은, 내가 올해 본 최고의 영화를 소개하고 싶다. 이근우 감독의 2012년 개봉작 '577 프로젝트'. 하정우, 공효진을 포함한 배우, 모델들이 20일에 걸쳐 577㎞ 국토대장정 길을 걷는 로드 다큐멘터리다. 일정상 하루 평균 30㎞를 가야 하므로 대원들은 아침 6시에 기상해 꼬박 여덟 시간을 매일 걷는 강행군을 해야 한다.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열여덟 명은 대부분 배우인데 그들에게 출연료는 딱 걸은 날짜만큼만 지급된다.
이들은 왜 이 험한 일에 자원했는가. 출연한 배우 중 하정우와 공효진을 제외하면 얼굴과 이름이 알려진 배우는 많지 않다. 많게는 10년 넘게 무명 배우생활을 한 이들은, 이미 배우생활이 지긋지긋하고 연기를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이들에게 이 프로젝트는 왠지 배우로서 새로운 삶을 위한 기회였고, 국토대장정을 완주하지 못하면 앞으로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는 마음으로 그 길을 걷기 시작했던 것이다.
국토대장정이란 타이틀은 낭만적으로 보이지만 30㎞를 8시간씩, 3주간 하루도 빠짐없이 걷는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경험이 많아 보이는 진행 스태프는 "첫 출발 3일 안에 30% 정도가 낙오한다"고 걱정스레 말한다. 아니나 다를까, 3일이 지나고 나니 아침에 모인 이들의 웃음기 가신 얼굴에 일그러진 표정들이 꾸밈없이 보인다. 국토대장정은 운동이 아니라 고된 노동에 가까운 것이고 그 강도 때문에 물집, 십자인대 손상, 열사병에 걸리는 게 다반사고, 이들보다 더 젊은 대학생들도 중도 포기하기 일쑤다.
이들 모두는 팀으로서 이 과업을 완수해야 하므로 중간에 낙오자가 발생하면 가차 없이 퇴출할 수밖에 없다. 의식불명으로 자기표현이 불가할 때, 의료진의 진단으로 낙오를 권고할 때, 의료진의 진단권고가 3회 누적됐을 때, 대오와 떨어지게 돼 다음날 출발지에 합류하지 못할 때 낙오된다.
대장 하정우는 낙오하려는 대원을 다독이고 악천후 속에 강행군 일정을 조정하며 훌륭하게 자기 역할을 수행한다. 이 작품에서 그의 인간적인 매력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그는 "한국인의 버릇 중 하나가 (쓸데없이) 파이팅을 하는 것인데, 이제 그런 거 그만하자"고 말한다. 며칠 동안 강행군을 하다 들어간 식당에서 주인으로 보이는 한 아저씨가 "그러니까 그 청춘을, 그 아름다운 청춘을 아끼지 마"라고 응원하는 장면도 재미있다.
우여곡절 끝에 여리게만 보이던 이 배우들은 어느새 멋진 강팀이 돼 있었고 무사히 대장정을 마친다. 이들에게 대장정의 도착지 해남에 가면 금은보화가 있을 거라는 기대, 뭔가 큰 깨달음이 생기고 인생의 문제가 풀릴 것만 같은 기대가 있었지만 기다리는 건 논밭밖에 없었다는 결말 역시 마음에 든다. 2011년 촬영 당시 무명이던 배우 대부분이 10년 후인 지금도 여전히 무명이라는 사실은 우리를 겸허한 마음으로 이끈다.(많은 출연자가 더 이상 작품활동을 하고 있지 못한 사실이 아프게 느껴진다.)
이제 며칠만 지나면 우리 역시 공평하게 2021년의 대장정을 마무리할 것이다. 한 해의 기쁨과 슬픔을 어떻게 정리할 수 있을까. 여전히 수그러들 줄 모르는 코로나 팬데믹은 우리를 힘들게 하지만 우리 시민들은 기꺼이 백신접종을 하고 꿋꿋하게 일상을 버텨나가고 있다. 우리 모두가 긴 터널을 행군하는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는데, 지금 서 있는 곳이 나중에 돌이켜볼 때 땅끝마을에 거의 도달한 시점으로 확인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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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대오로부터 멀어지려는 시민들을 붙잡아 일으켜 세우고 서로 등짐을 나눠지며 조금만 더 버텨야 하는 순간이 아닐까. 팀 대한민국이 억지로 파이팅하지는 말고 서로 조금씩만 위로의 말을 건네며 이 대장정을 마무리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렇게 되기를 진심으로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