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광장]내셔널지오그래픽과 와이 낫?

[청계광장]내셔널지오그래픽과 와이 낫?

이병철 시인(문학평론가)
2025.03.11 02:05
이병철 시인(문학평론가)
이병철 시인(문학평론가)

'내셔널지오그래픽'이라는 문구만 봐도 가슴이 뛴 적이 있다. 다큐멘터리 속에 펼쳐진 대자연은 어린 시절 무한동경의 세계였다. 시베리아 호랑이의 사냥이나 베링해 혹등고래의 물기둥 앞에선 좋은 집과 큰 차, 안정된 직장, 명예니 성공이니 하는 것들이 다 시시한 장난처럼 보였다. 좁고 하찮은 세속도시의 삶을 떠나 내셔널지오그래픽에 취직하고 싶었다. 눈표범과 마운틴고릴라와 마다가스카르 펭귄을 눈앞에서 보고 담고 세상에 소개하는 일을 하고 싶었다.

'싶었다'만큼 무의미하고 한심한 게 또 있을까. "세상을 보고 무수한 장애물을 넘어 벽을 허물고 더 가까이 다가가 서로를 알아가고 느끼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의 목적이다"(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라고 당당히 말하는 사람이고 싶지만 현실은 대출이자에 허덕이며 시간당 3만5000원의 대학 강의에 울고 웃는 처지가 됐다.

2023년 내셔널지오그래픽은 경영난을 이유로 135년을 이어온 종이잡지의 발행을 중단했다. 그러면서 기자 19명 전원을 해고했다. 2013년 개봉한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에 비슷한 상황이 펼쳐진다. 온라인 시대에 발맞춰 '라이프'가 더이상 종이책을 발간하지 않게 되자 편집자와 기자, 사진인화부서의 직원이 대량 해고된다. 제목처럼 10년 뒤 영화는 현실이 됐다.

모든 게 효용과 가치라는 자본논리에 좌우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자본사회의 상품들은 욕망을 부추긴다. 방송인 이수지의 '대치맘' 패러디도 그 지점을 환기한다. 주체성 없이 타인들의 시선과 기준에 스스로를 맞추는 스노비즘을 유머러스하게 꼬집지만 한바탕 웃고 나면 어딘지 씁쓸해진다. 왜 남들과 똑같이 살아야 하는가, 왜 브랜드아파트와 대형 세단과 명품과 몽클레어 패딩과 영어유치원과 명문대학을 욕망해야 하는가, 그것들이 진짜 내 꿈인가 하는 의심이 든다. 하지만 그 대열에서 이탈하는 통쾌함보다 이탈하는 순간 패배자가 되리라는 불안감이 결국 승리한다. 철학자 발터 벤야민은 자본사회에서 개인들의 꿈은 상품으로 공동화된다고 말했다. 인터넷에서 내셔널지오그래픽을 검색하면 패션의류 상품만 나열된다.

20년 전인 2005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허름한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나 이틀 동안 함께 걷고 마시고 비 맞고 한쪽씩 나눠 낀 이어폰으로 조용필의 '꿈'을 들은 내 친구의 이름은 미켈레다. 둘 다 가난한 여행자였지만 하고픈 일 앞에서 망설이던 내게 '와이 낫?'(why not?')을 알려준 나의 조르바. 단 이틀이어도 사람과 사람이 운명적으로 만날 땐 찰나가 영원이 된다. 이 친구가 알려준 '와이 낫?' 덕분에 나는 20대와 30대를 획일화된 욕망에서 비껴선 채 꿈과 낭만을 좇으며 살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연락한 게 2021년인데 며칠 전 새벽 불쑥 반가운 메시지가 왔다. 20년 전에도 바이크로 유럽을 횡단한 히피답게 아내와 함께 네팔과 인도의 대자연 속에서 자유롭고 영적인 삶을 살고 있는 모습을 보내왔다. 아마 거기서 얼마간 머물다 또 바이크를 타고 다른 대륙으로 갈 것이다. 덕분에 행복이 무엇이고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 생각해봤다. 나도 한때는 저 친구처럼 살았고 계속 그렇게 살고자 했는데 지금은 뭐하고 있나. 비좁고 답답한 상자 속에서 온갖 비본질과 타인들의 욕망에 사로잡힌 노예가 됐다.

나는 내가 너무 한국인으로, 그것도 서울사람으로, 표준인으로만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가족, 경력, 직장, 모국어, 문학, 인간관계, 음식, 문화, 의료, 사회서비스 같은 게 때로는 다 족쇄 같다. 어느 날은 추억마저, 사랑마저 새장처럼 갑갑하다. 나이 들수록 더 표준인으로, 더 규격화된 인간으로, 더 열정적으로 무기력하게, 내게 얼마 남지 않은 바보와 아이를 추방하면서 기성이 될 것이다. 아니 이미 기성이 됐다. 우리가 다시 만나면 미켈레는 나를 보며 뭐라고 할까. 그때 그가 한 번 더 "와이 낫?"을 크게 외쳐준다면 나는 20년 전처럼 가슴이 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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