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01년 작센과 프로이센, 독일의 두 영방(領邦)국가는 19세 청년 하나를 두고 외교전을 벌였다. 그의 이름은 요한 프리드리히 뵈트거. 독일 동부 슐라이츠 출신의 이 청년은 14세에 고향을 떠나 베를린의 약국에 수습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의 관심은 약 제조보다 연금술에 있었다. 그는 베를린의 다른 연금술사들과 교류하며 금으로 바꾸는 촉매, '현자의 돌'을 연구했다. 그리고 연금술에 회의적이던 약국의 약사를 설득하고자 그해 1월 은을 금으로 바꾸는 시연을 펼쳤다.
눈속임이었겠지만 이 실험이 성공했다는 소문이 독일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이를 들은 프로이센의 군주 프리드리히 3세가 그를 베를린 궁으로 불렀다. 감당할 수 없었던 그는 베를린 서남쪽 비텐베르크로 달아났다. 프리드리히 3세는 바로 수배령을 내렸고 뵈트거는 결국 비텐베르크 당국에 체포됐다. 곧 프로이센으로 이송될 처지가 되자 뵈트거는 작센의 군주인 강건왕 아우구스트 2세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이 가진 기술과 감금된 이유를 설명하며 비텐베르크에서 연구를 이어갈 수 있게 해달라고 했다.
아우구스트 2세는 강력한 통치력과 은광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작센의 수도 드레스덴을 바로크 문화의 중심지로 성장시켜 나갔다. 뵈트거의 편지를 받은 왕은 1701년 11월 그를 드레스덴으로 이송했다. 그리고 프로이센이 그를 데려갈까 염려해 귀족의 집에 숨겨두고 연금술에 매진하게 했다. 1703년부터는 아예 드레스덴성의 '골드하우스'로 옮겼다. 좋은 환경에서도 딱히 성과를 낼 수 없었던 뵈트거는 오스트리아로 달아났으나 얼마 못 가 다시 잡혔다.
그는 결국 죄수의 신분이 됐고 왕과 일정 시점까지 금 생산을 약속해야 했다. 그리고 감시인을 뒀는데 이 중 한 명이 에렌프리트 발터 폰 치른하우스였다. 치른하우스는 광학, 유리제조에 조예가 깊었고 여러 혁신적인 기술을 개발했다. 당시 그는 유럽에선 만들 수 없어 전량을 수입에 의존하던 도자기 제작에 관심을 가졌다.
치른하우스는 뵈트거에게 연금술의 굴레에서 벗어나 도자기 개발로 전향할 것을 권유했고 목표를 바꾼 뵈트거는 바로 성과를 쏟아냈다. 1707년 뵈트거는 경질 자기 제작에 성공했고 2년 뒤엔 유약도 개발했다. 연금술사 뵈트거는 황금을 만들지는 못했지만 당시 '백색 황금'으로 불린 도자기 제작에 성공했다. 그 무렵 프로이센에선 연금술사 카에타노가 사기죄로 처형됐다. 1710년 도자기 제작 성공과 드레스덴의 공장설립 소식이 공표됐다. 공장은 곧 인근 마이센으로 이전됐다. 바로 유럽 최초의 도자기이자 지금도 명품으로 널리 알려진 '마이센'(MEISSEN)이다.
뵈트거를 후원한 아우구스트 2세의 노력으로 드레스덴은 중부유럽의 문화 선진도시가 돼 '엘베강의 피렌체'로 불렸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말 연합군의 공습으로 도시 대부분이 파괴되고 아름다운 건축물은 잿더미로 변했다. 이후 오랜 노력으로 옛 건축이 하나씩 복원되면서 현재는 독일에서 아름다운 도시 중 하나로 꼽힌다. 최근 드레스덴은 별명이 하나 더 늘었다. '실리콘 작소니(작센)'다. 드레스덴공과대학을 기반으로 첨단 반도체산업이 몰리면서 도시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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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5일 드레스덴 성에선 국립중앙박물관과 드레스덴박물관연합(SKD)이 공동개최한 '백 가지 행복, 한국문화특별전'이 문을 열었다. 국보 금관총 금관, 금허리띠와 함께 우리 도자문화의 흐름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청자와 분청사기, 백자 등이 전시됐다. 전쟁의 폐허를 딛고 일어섰다는 점, 그리고 '문화에 애정을, 혁신에 관심을' 가졌다는 공통점은 관람객에게 더 깊은 울림을 선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