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 위스키의 역사는 1920년대부터 시작됐다. 스코틀랜드 기술을 기반으로 오사카에 야마자키 증류소를 설립하며 '시로후다'(白札)를 출시한 산토리가 일본 최초의 위스키 회사다. 산토리는 일본인의 입맛에 맞춘 부드러운 맛을 중심으로 출시한 제품들이 국제대회에서 최고점수를 받으며 일본 위스키의 위상을 세계적으로 알렸다. 산토리의 오리지널 브랜드 '야마자키' '히비키' 등 연식이 높은 위스키는 웬만해선 구하기 힘들 정도로 세계적인 위스키 명품이 됐다.
일본 위스키가 세계적으로 인정받기 시작하고 일본 주류시장을 서서히 잠식하면서 사케와 맥주로 양분됐던 일본 전체 주류시장에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게다가 위스키 전문회사 산토리가 최고급 프리미엄 맥주를 출시하며 돌풍을 일으키면서 일본 주류시장은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이에 질세라 주요 맥주회사들도 위스키 시장에 출사표를 던지며 새로운 제품들을 시장에 속속 내놓았다. 그런데 이 피 터지는 혈투에 참전한 여러 회사 중 일본 3대 맥주회사 중 하나인 기린맥주가 최근 내놓은 독특한 위스키 제품이 화제를 일으키며 입소문을 타고 있다.
온라인으로 출시하자마자 불과 4분 만에 1억엔(약 9억3000만원)을 돌파한 이 제품은 그 이름과 콘셉트에서 일반적인 위스키 제품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일 정도로 상상 이상이다. '인생과 함께하는 위스키'로 명명된 이 제품의 깜짝 놀랄 만한 콘셉트는 구매하고 20년이 지나야 받아볼 수 있다는 점이다. 한 병에 무려 11만엔(약 100만원)의 고액을 지불하고도 20년 후에야 받아볼 수 있는데 출시하자마자 폭발적인 반응을 보인 것이다.
이 이야기는 4년여 전으로 돌아간다.
2021년 3월 기린의 사내에서 신규사업 제안제도가 시행되자 마케팅팀의 고지마씨는 '20년 후에 도착하는 위스키'를 제안해 그럭저럭 1차 심사를 통과했다. 하지만 평가가 그다지 좋지 않았고 이러다 다음 심사에서 떨어지겠다며 조바심을 내던 중 얼마 전 태어난 아이를 떠올리며 기가 막힌 아이디어를 도출한다. 일본도 마찬가지로 아이를 키우면서 키가 자랄 때마다 벽에 표시를 해놓고 추억을 만들어가는데 이런 모습들을 위스키 숙성에 대입한 것이다.
고지마씨의 상품설계는 20년 후 제대로 숙성된 한 병을 전달하는 것은 변함이 없지만 숙성과정에서 기념될 만한 연도를 정해 테스트를 할 수 있는 미니어처병을 6회 전달해 '아이'가 자라나는 모습을 직접 느끼게 해주는 콘셉트다.
그 연차의 기획력도 기발하다. 아이가 태어나는 0년(오크통에 들어가기 전이라 투명), 건강을 기원하는 명절인 3년, 초등입학 연차인 7년, 2분의1 성인식 10년, 중학입학 13년, 고교입학 16년 등으로 나눠 총 6회에 걸쳐 테스트 미니보틀이 집으로 배달되는데 패키지 디자인도 매우 독특하다.
다소 두꺼운 형태의 연차가 새겨진 북패키지 내부에 미니보틀 2병이 가지런히 놓여 있어 가족과 함께 기념일에 샘플 일부를 활용해 건배를 하고 다시 책장에 연차별로 일렬로 전시할 수 있게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정식 보틀에 담긴 20년산 위스키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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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지마씨는 이 아이디어가 최종 채택된 후에도 시장에서 어떤 반응을 보일지 불안한 마음에 일본 내 유력 크라우드펀딩 사이트인 마쿠아케(Makuake)에 론칭했는데 그 결과는 엄청났다. 4분 만에 1억엔 달성은 물론 하루 만에 2억7000만엔(약 25억원)을 달성함으로써 마쿠아케 역사상 가장 빠르게 최고액을 넘겼고 이번 프로젝트 위스키 1차 생산량을 채우며 성공적으로 마감했다.
원래 위스키 생산라인에서 근무한 기획자 고지마씨가 이 프로젝트를 알리기 위한 광고영상에 직접 출연해 제품기획의 계기와 의미를 진솔하게 얘기한 것이 한몫 했다는 평도 있다.
한 직원의 작은 아이디어가 일으킨 큰 기적이다. 또한 20년 후를 믿어주며 기꺼이 거액을 지불한 시장의 두터운 신뢰가 부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