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광장]호랑이, 두려움에서 귀여움으로

[청계광장]호랑이, 두려움에서 귀여움으로

이태희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
2025.09.26 02:05
중앙박물관 이태희 연구관
중앙박물관 이태희 연구관

몇 년 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중앙아시아 출토 한문문서를 해석하던 중 '대충'(大蟲·큰 벌레)이란 단어가 나왔다. '대충이나 이리를 죽였을 때 상으로 주기 위해 고을이 미리 확보해둬야 할 재원'에 관한 규정이었는데 대충이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처음에는 메뚜기 같은 해충을 이야기하는가 싶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차에 중국 수리관개사를 연구하는 동학을 만나 보여주니 바로 "호랑이네"라고 한다. 그제야 당나라 때 호랑이 '호'(虎)자는 고조 이연(李淵)의 조부, 이호의 이름글자였던 까닭에 다른 글자로 바꿔 썼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호랑이를 '큰 벌레'로 바꿔 부른 데서도 알 수 있듯 호랑이는 해악을 끼치는 짐승이었다. 당나라 때는 호랑이를 잡은 이에게 비단 4필을 상으로 줬다. 호랑이는 가축을 해칠 뿐 아니라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기도 했다. 세기말 VHS 비디오테이프는 영화가 시작되기 전 과거의 어린이들이 겪은 가장 큰 재앙으로 '호환(虎患), 마마, 전쟁'을 꼽았는데 호환이 바로 호랑이로 인한 인명피해였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호환 관련 기사가 여러 차례 등장한다. 산세가 험하지 않은 지역에서도 호랑이의 습격은 잦았다. 영조는 피해보고가 끊이지 않는데도 포상만을 청한 충청감사를 직접 조사하도록 했다. 호랑이로 인한 위협은 일제강점기까지 이어졌고 이 과정에서 호랑이를 잡는 명포수들이 등장했다.

호랑이에게 잡아먹히는 일은 그 자체로도 끔찍한 일이지만 그렇게 죽은 이들은 사악한 귀신이 된다고 믿었다. '창귀'(倀鬼)로 불리는 이 귀신은 자신을 잡아먹은 호랑이에게 붙어 사람을 잡아먹는 일을 돕는다고 한다. 박지원의 소설 '호질'에 따르면 호랑이가 처음 잡아먹은 사람은 호랑이의 겨드랑이에 달라붙어 인가의 부엌으로 인도하고, 두 번째로 잡아먹은 사람은 볼에 붙어 사냥꾼과 덫을 피하게 해주며, 세 번째로 잡아먹은 사람은 턱에 붙어 친구들의 이름을 불러낸다고 한다. 병자호란 후 청나라가 명나라를 칠 원병을 요구하자 전 대신 김상헌은 창귀가 돼선 안 된다는 상소를 올렸다. 청나라를 호랑이에, 조선을 이미 호랑이에게 먹힌 사람에 비유한 것이다.

호랑이에게 물려 죽은 망자의 가족들은 시신을 수습해 바로 그 자리에서 화장했다. 사악한 기운이 흩어지지 않게 있던 자리에서 모두 사르고자 함이다. 그리고 돌을 쌓고 위에 시루를 엎어놓은 뒤 시루 가운데에 구멍을 내어 칼이나 실이 감긴 가락을 꽂아 무덤을 만들었다. 시루는 창귀를 가두는 감옥이자 형구며 가락은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아 그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하는 장치다. 원혼이 됐더라도 호랑이를 따라다니며 사람들을 해쳐 악업을 쌓지 말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호랑이와 인간이 하나의 자연을 놓고 다투는 곳 어디에서나 호랑이는 공포의 대상이 됐다. '정글북'의 악당 쉬어 칸을 보면 멀리 인도에서조차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드센 기운과 사나운 성질 탓에 무인의 표상이자 벽사의 상징이 된 이면에는 이런 극한의 공포가 있었다. 우리 선인들은 호환에 내내 시달렸음에도 호랑이를 해학적으로 풀어냈다. 공자는 가혹한 정치를 호랑이에 비교했으나 우리는 호랑이로 혹독한 정치를 꾸짖었다. 더러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묘사해 별것 아닌 듯 보이게 했다. 죽을 병에는 독약을 쓴다고 어쩌면 공포를 이겨내는 하나의 방법이었을지 모른다.

화약무기의 발달로 인간과 호랑이 사이의 오랜 힘겨루기는 막을 내렸다. 경쟁에서 밀려난 호랑이는 이제 개체수가 급격히 줄어 인간이 보호할 대상이 된 지 오래다. 이제 호랑이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귀여운 마스코트가 됐다. 특히나 우리에게는 조선시대 까치, 호랑이 이래 호돌이, 수호랑, 더피까지 문화의 아이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형이고 배지고 가방에 호랑이를 달고 박물관을 찾는 학생들을 보니 호랑이 담배 피우던 옛날 옛적에는 인간의 영혼이 호랑이에게 붙어다녔다면 요즘은 호랑이의 영혼이 인간과 함께 다니는 게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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