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긴 추석연휴를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왔다. 요즘은 가족이 모인 자리에서도 정치 얘기는 삼가야 한다기에 화제를 꺼내지 않았지만 연휴 직전 더불어민주당이 "중국인 혐오를 법으로 막겠다"며 반중시위를 금지하는 법안을 발의한 것은 블랙코미디였다. 이재명 대통령과 여당이 비판세력을 '극우'나 '내란세력'으로 몰아붙이는 일은 새삼스럽지 않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가 그들이 '혐오조장'이라는 이름으로 정치적 반대를 봉쇄하기 시작한 것이 심상치 않다.
이런 도덕적 전체주의 언어는 조지 오웰의 '1984'를 떠올리게 한다. '전쟁은 평화다. 자유는 예속이다. 무지는 힘이다'(War is peace. Freedom is slavery. Ignorance is strength). 이런 허구의 구호가 전체주의 사회에서 통했다는 사실이 섬뜩하다. 포용을 내세워 민주주의의 핵심가치인 자유를 억압하려는 이재명식 도덕정치 역시 오웰이 경고한 '이중사고'(二重思考, doublethink)의 혐의를 피하기 어렵다.
이재명식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은 '통합'과 '국익'을 명분으로 표현의 자유를 제약하고 정권에 대한 비판을 억누른다. 서울대 행정대학원 최병선 명예교수 등이 공동으로 집필한 '그래도 민주주의'가 지적하듯 정치적 올바름은 약자보호와 공존의 언어였지만 이제는 도덕적 근본주의로 변질돼 다른 의견을 배척하는 수단으로 전락했다. 특히 '다양성·형평성·포용성'(DEI) 담론은 '정파적으로 옳은 생각만 허용하는' 새로운 형태의 검열장치로 악용된다.
반미·반일선동은 '표현의 자유'로 용인하면서 반중시위는 '혐오'로 처벌하려는 현 집권세력의 이중성을 보라. '극우 프레임'을 앞세워 비판을 봉쇄하고 '차별금지법 반대는 곧 평등부정'이라는 이중사고를 강요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혐오를 막기 위해' '국익을 위해' '국민통합을 위해'라는 명분 아래 표현의 자유를 포기하라는 요구는 민주주의에 스스로 족쇄를 채우라는 말과 마찬가지다.
지금 서구사회도 혐오와 반혐오, 증오와 반증오의 악순환 속에서 몸살을 앓고 있다. 독일에서는 '반유대주의 금지'를 내세워 팔레스타인 연대시위를 강제로 해산하고 DEI를 표방해온 미국 명문대들은 정부의 압박에 밀려 친팔레스타인 시위를 금지한다. 혐오가 반혐오를 낳고 그것이 다시 혐오를 부추기는 가운데 표현의 자유가 설 자리는 점점 좁아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도 한국 사회만큼 위태로워 보이진 않는다.
표현의 자유에 따른 혐오나 반혐오의 언어가 누군가에겐 불편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공론의 장에서 사회적 합의로 풀어야 할 문제지 권력이 선택적으로 옳고 그름을 재단할 사안이 아니다. 민주시민이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최후의 보루는 표현의 자유고 그 '불편함'조차 감내하며 지켜야 한다. 불편한 자유를 견디지 못해 국가권력에 기대는 시민은 결국 노예의 길(The Road to Serfdom)로 향한다는 것이 자유주의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의 경고였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깨어 있는(woke) 시민이 아니라 깨어난(awakened) 시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