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을 극장에 불러모으기 위한 다양한 시도
작거나 스펙터클하거나 관객참여형이거나
스크린 사라져도 '이야기'는 버릴 수 없어
영화 '호프'는 절반의 성공에서 멈출 것 같다. 한국영화의 시름은 더 깊어졌다. 최대 규모의 제작비, 칸 필름마켓 선판매, 나홍진이라는 이름의 화려한 수사가 힘없이 저물고 있다. OTT 플랫폼에 내준 관객을 되찾기 위한 극장의 노력도 신통찮다.
'호프'는 스펙터클만으로 관객을 극장에 붙들어 둘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대중영화는 여전히 볼거리와 이야기의 조화가 중요하다. 화면이 커질수록 헐겁지 않은 서사를 채워 넣어야 한다. '호프'가 극도의 호불호 반응을 오가는 까닭은 서사의 자리에 모호한 메시지를 욱여넣었기 때문이다.
기대작의 부진은 한국영화의 미래를 생각하게 한다. 한국영화라는 이름만으로 관객을 다시 극장에 불러 모을 수 있을까. 극장의 선택은 두 가지다. 하나는 고전영화와 예술영화 중심의 작은 영화관으로 가는 길, 다른 하나는 작은 모니터로는 결코 재현할 수 없는 대규모 스펙터클의 길이다.
미국에서는 극단적인 실험이 진행 중이다. 라스베이거스의 스피어(Sphere)는 높이 112m, 지름 160m의 구형 공연장이자 돔 형태의 영화관이다. 16K 해상도 LED가 관객을 360도로 감싼다. 16만 7000개 스피커와 좌석의 진동, 바람과 향기까지 동원된다. 3조 원이 들었다는 이 공간에서 지금 1939년 영화 '오즈의 마법사'가 상영 중이다.
'오즈의 마법사'는 인공지능 아웃 페인팅으로 원본의 4:3 화면을 구체 전면에 확장하여 86년 만에 다시 태어났다. 아카이브에서 나온 고전영화가 동시대적 체험을 선물하는 것이다. 극장은 이제 그저 '보는 공간'에서 '들어가는 공간'으로 바뀌고 있다. 최고가 티켓이 249달러(약 35만 원)인데도 연일 매진이다.
스피어에서 상영 중인 '오즈의 마법사'는 과연 영화인가, 놀이기구인가. 흔들리는 의자, 향기가 나는 자리에 앉은 관객은 영화를 보는가, 테마파크를 체험하는가. 극장의 진화가 영화라는 형식을 해체하는 과정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여기 세 번째 선택이 있다. 2024년 9월 문을 닫은 대한극장은 리모델링을 거쳐 이머시브(몰입형) 공연 '슬립 노 모어'의 무대가 되었다. 관객은 가만히 좌석에 앉아 있는 대신 가면을 쓴 채 건물을 돌아다니며 참여형 연극을 즐긴다. 롯데시네마는 상영관을 통째로 체험형 공연장으로 바꾼 '인사이드 더 플레이: 군체'를 내놨다. 극장 공간에서 관객이 직접 좀비가 되어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참여형 스릴러 공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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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극장은 원래 그런 곳이다. 정유선은 최근 출간한 '극장사회'에서 한국 극장의 사회적 의미를 다루면서, 1907년 문을 연 단성사가 당시 '힙 플레이스'였다고 말한다. 극장은 언제나 동시대 대중의 열망을 한데 모으는 최신의 도시 문명을 체험하는 공간이었다는 것이다.
극장은 처음부터 하나의 장르에 귀속되지 않았다. 극장은 그때마다 가장 새로운 이야기 형식을 담아내는 그릇이었을 뿐이다. 판소리가 울려 퍼지던 자리에 활동사진이 걸리고, 활동사진의 자리에 영화가 들어서고, 이제 몰입형 공연이 밀려든다. 극장이 영화를 잃는 상황이 슬프게 보이는 까닭은, 우리가 영화관 100년을 극장의 전부라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극장은 태어나고 사라지길 거듭해 왔다. 수십 년 전 유행하던 재개봉관, 삼개봉관은 시대의 흐름에 밀려났다. 단관은 멀티플렉스로 바뀌었다. 그러니 극장의 내일이 어떻게 될지를 묻는 건 사실 이야기의 미래에 관한 물음이다. 관객은 점점 가만히 오랫동안 앉아 있기를 거부한다. 짧게 보고, 건너뛰고, 댓글을 달고, 결말을 검색한다. 이야기는 수동적 관람을 견디지 못하는 관객을 자기 내부로 끌어들이는 방향으로 진화하는 중이다.
스크린이 사라진 대한극장 안에 가면을 쓴 관객이 서 있는 풍경은 극장의 죽음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시대가 원하는 형식으로 이야기를 바꾸는 과정이다. 극장은 영화를 버릴 것이다. 그러나 이야기를 버릴 수는 없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