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모르는 게 부끄러워 거짓말하고 살았지"

"글 모르는 게 부끄러워 거짓말하고 살았지"

뉴스1 제공
2020.10.09 06:00

한글 공부하는 광주 희망학교 늦깎이 학생들
"한글 공부 마치고 자막 나오는 영화 보는 게 꿈"

574돌 한글날을 하루 앞둔 8일 오후 광주 북구 희망학교에 한글을 배우고자 모인 10여명의 할머니들이 국어교사의 설명에 맞춰 받아쓰기를 하고있다.2020.10.8/뉴스1 © News1 이수민 수습기자
574돌 한글날을 하루 앞둔 8일 오후 광주 북구 희망학교에 한글을 배우고자 모인 10여명의 할머니들이 국어교사의 설명에 맞춰 받아쓰기를 하고있다.2020.10.8/뉴스1 © News1 이수민 수습기자

(광주=뉴스1) 이수민 수습기자 = "1번 문제, 넓은 들판을 보니 흐뭇하구나. '널븐' 아니고 '넓은'이에요."

"그게 무슨 말이여? '널븐' 아니야?"

"아니에요. 어머니, 밑에 받침 리을비읍. 그럼 '흐뭇' 할 때 밑에 받침은 뭘까요?"

574돌 한글날을 맞아 8일 오후 찾은 광주 북구 희망학교. 10여명의 할머니들이 국어 교사의 설명에 맞춰 받아쓰기를 하고 있었다.

받침이 들어간 어려운 단어에 고개를 갸우뚱하던 할머니들은 곁눈질로 옆자리 사람의 답안을 베끼기도, 숨기기도 하며 쪽지 시험을 이어갔다.

이들은 희망학교 초등 3단계(5·6학년)인 진달래반에서 뒤늦게 한글을 공부하는 60·70대 노인들이다.

희망학교는 지난 1968년부터 한글을 배우지 못한 노인을 대상으로 초등과정과 중등 과정 수업을 진행해왔다.

초등반의 경우 학력 인정을 받을 수 있는 3개 반이 개설돼 120명의 학생이 학구열을 불태우고 있다.

어렸을 때 한글을 배우지 못한 저마다의 사연은 절절하다.

동생의 학비를 벌기 위해 공장에 나가느라 학업을 중단한 할머니부터 일찍 시집을 가 가정을 돌보느라 공부는 시작도 못했다는 할머니까지 다양하다.

평생 재봉틀을 돌리고 설거지를 했을 주름진 손으로 연필을 꼭 쥐고 종이 위에 꾹꾹 글씨를 눌러 새긴다.

574돌 한글날을 하루 앞둔 8일 오후 광주 북구 희망학교에 한글을 배우고자 모인 10여명의 할머니들이 국어교사의 설명에 맞춰 받아쓰기를 하고 있다.2020.10.8/뉴스1 © News1 이수민 수습기자
574돌 한글날을 하루 앞둔 8일 오후 광주 북구 희망학교에 한글을 배우고자 모인 10여명의 할머니들이 국어교사의 설명에 맞춰 받아쓰기를 하고 있다.2020.10.8/뉴스1 © News1 이수민 수습기자

이날 받아쓰기 100점을 받은 학생은 맨 앞줄에서 수업을 듣던 60대의 김성심(가명) 할머니. 김 할머니는 "3년 전만 해도 이름도 쓸 줄 모르던 까막눈이었다"고 했다.

"글 모르는 게 부끄러워서 보험회사 간다고, 수영학원 다닌다고 거짓말하고 여길 왔지. 아들에게도 부끄러워서 싱크대 밑에 책을 숨겨두곤 했다니깐."

김 할머니는 "얼른 배우고 싶은 마음에 새벽마다 몰래 연습장에 글공부를 했다"면서 "어렸을 때 가난해서 못 배웠던 설움을 이제는 훌훌 털어버렸다"며 웃어 보였다.

인근 시장에서 수십년째 과일을 판매해온 베테랑 최미자(가명) 할머니도 희망학교의 학생이다.

그는 "시장에서도 글 모르는 걸 들킬까봐 뭐라 쓰여 있는지 몰라도 그냥 아는 척하면서 고개만 끄덕였었다"고 지난날의 설움을 털어놨다.

최씨 할머니는 얼마 전 직접 쓴 글자를 앞에 두고 장사를 했던 사연을 자랑했다.

할머니는 "아예 못 쓰다가 좀 배우고 '차뫼'로 썼었는데 이제는 '참외'라고 제대로 쓴다"며 "인생에 자신감이 없었는데 한글을 배우고 나니까 어딜 가든 자신감이 올라간다"고 활짝 웃었다.

574돌 한글날을 하루 앞둔 8일 오후 광주 북구 희망학교에 한글을 배우고자 모인 10여명의 할머니들이 국어교사의 설명에 맞춰 받아쓰기를 하고있다.2020.10.8 /뉴스1 © News1 이수민 수습기자
574돌 한글날을 하루 앞둔 8일 오후 광주 북구 희망학교에 한글을 배우고자 모인 10여명의 할머니들이 국어교사의 설명에 맞춰 받아쓰기를 하고있다.2020.10.8 /뉴스1 © News1 이수민 수습기자

초등반을 수료했지만 아직 중등반에 올라가기가 겁이 나 1년 더 수업을 듣는다는 '왕고참' 윤영희(가명) 할머니는 "이제는 은행 가서도 내가 스스로 알아서 한다"고 말했다.

윤 할머니는 "이제는 글을 배우니까 어디 가도 글만 보이고 하루종일 글자들이 머릿속에 떠다닌다"며 "중등반에 올라가면 영화관도 간다던데 한글 공부하면서 오래 살아서 자막 나오는 영화를 보는 게 목표"라고 했다.

희망학교 한미준 원장(48·여)은 "기역, 니은도 모르던 어머니들이 글을 배워 시화전에 독특하고 기발한 작품을 출품하는 모습을 볼 때면 뿌듯하다"고 말했다.

다음날 진도를 먼저 알려주면 할머니들은 손가락에 굳은살 박혀가며 공책에 빼곡하게 예습해온다. 그럴 때면 보람도 느낀다고.

"한 어머니께서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서 '선생님 이제 내가 한글을 읽어요'라고 말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해요. 모든 어머니들께서 우리 한글을 쓰고 읽는 날까지 열심히 가르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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