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1) 서영진 기자 =

지난 17일 사망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은 1994년 7월 김일성 주석 사망 이후 17여 년 간 북한을 철권 통치했다.
후계자로 확정된 1974년부터 37년간 북한의 실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김 주석보다 급진적이고 냉혈한 통치 스타일로 '폭군'의 칭호를 얻어 북한 '독재의 역사'를 새롭게 쓴 인물이다.
◇우상화 위해 출생 조작…배고프고 외로운 어린시절=김정일은 공식적으로 1942년 2월16일 백두산 밀영에서 태어났다고 알려졌지만 이는 아버지인 김일성의 출생년도(1912년)와 끝자리를 맞추고 부자의 우상화를 위해 철저히 조작된 것이다.
북한은 김정일의 탄생지로 주장하는 밀영을 북한 공산주의의 성지로 만들었다.
실제로는 아버지인 김일성의 항일 빨치산 부대가 활동하던 1941년 러시아 연해주에 위치한 하바롭스크 근교에서 김 주석과 김정숙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김정숙의 정(正)과 김일성의 일(日)을 한 자씩 따서 지어진 것으로 알려진다. 그의 소련식 이름은 ‘유라’다.
이후 김정일은 김일성이 평양에 들어온 두 달 뒤인 1945년 11월25일 어머니 김정숙과 소련 함정을 타고 함경북도 웅기항을 통해 북한에 첫 발을 내딛었다.
북한에 입성한 김정일의 어린 시절을 배고팠다. 북한의 정치 사정이 안정되지 않았고 경제사정도 그리 넉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육은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김일성이 북조선공산당 책임비서 자리에 오른 1946년 고위급 자녀들만 다니는 남산유치원에 입학했고 1948년 9월 1일 우리의 초등학교 격인 남산인민학교 예비반에 입학한다.
일주일여 후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세워지고 김일성은 주석으로 추대됐다.
하지만 절대권력을 가진 아버지 밑에서도 김정일은 유년을 외롭게 보냈다. 동생인 만일(유라)이 주석궁에서 김일성과 놀다가 물에 빠져 죽었고, 7세 때(1949년) 어머니 김정숙마저 출산 중 사망하며 계모 김성애의 손에 길러졌다.
후계자의 면모는 남산중학교와 남산고급중학교 시절부터 나타났다. 주체사상과 공산주의사상 강화를 위한 각종 청년활동과 집회를 선두에서 이끌었다.
이 같은 활동은 1960년 9월 김일성종합대학교 정치경제학과에 진학하고 이듬해인 1961년 7월22일 조선노동당에 입당할 당시에도 지속된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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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평당원 시절에도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 최고인민회의, 정치·군사회의 등 주요 회의에 참여하는 특별 혜택을 받았다.
◇대학 졸업 후 北 2인자로 급부상, 냉혈한 정적 축출 작업=1964년 김일성종학대학교 경제학부 정치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조선노동당의 핵심인 조직지도부 지도자로 임명돼 본격적인 후계자 수업에 들어갔다.
지도원 시절 김정일은 박금철·이효순 등 고위층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체제에 위협이 될 만한 인물을 숙청하는 작업을 강행하는 등 아버지를 향한 충성심을 과시했다.
실제로 그는 1967년 4월 열린 조선노동당 중앙위 제4기 15차 전원회의에서 박금철·이효순 등 반대파 20명의 죄를 폭로한 뒤 당에서 축출했다.
그 직후 김정일은 관심이 있는 분야인 영화·소설·음악 등 예술 부분을 전담하는 선전선동부 문화예술 지도과장으로 자리를 옮겨 예술작품을 통해 김일성 유일사상체계 확립을 위한 사상투쟁을 주도했다. 이때부터 그는 권력의 꼭대기에 오르기 위한 속내를 드러냈다.
또 유일한 후계자로 낙점받기 위해 이복동생과 친인척 등을 제거하는 작업에도 몰두했다. 1970년대 초반 삼촌 김영주를 자강도 강계로 아내 외부와 철저히 차단하고 격리했다.
김정일은 32세 때인 1974년 2월 중앙위원회 5기 8차 전원회의에서 공화국 영웅 칭호를 받으며 김일성의 공식적인 후계자로 추대됐다.
1975년부터는 계모 김성애와 동생 김평일 등 이복동생들을 모두 해외로 내쫓아 북한 내부에서 새로운 반대세력이 생길 가능성을 철저히 차단했고, 이와 관련된 인물을 찾아 철저히 조사해 평양에서 추방했다.
정적을 축출하고 어느정도 안정을 찾은 김정일은 1980년 10월 6차 당대회에서 정치국 위원, 정치국 상무위원, 당 중앙군사위원 자리를 한꺼번에 거머쥐며 유일한 후계자임을 대내외에 공식적으로 알렸다.
1983년 한국을 뒤흔들 목적으로 전두환 대통령이 방문한 미안마 양곤 국립묘지 폭파를 지시했다. 이 사건으로 서석준 부총리를 비롯해 17명의 수행원이 사망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1년여 앞둔 1977년 11월 115명의 목숨을 앗아간 'KAL기 테러'를 주도한 것으로 알려지는 등 남한 공격을 통해 권력의 꼭대기로 올라서기 위한 욕망을 가감없이 드러냈다.
후계자로 있는 동안 선 굵은 행보를 보인 결과 1990년부터 3년간 매 년마다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 최고사령관, 공화국 원수로 추대 받으며 김일성이 가지고 있던 권력의 상당부분을 권력을 이양받았다.
김일성 사망 1년 전인 1993년 국방위원장을 공식 승계해 북한의 공식 1인자 자리에 올라 김정일 정권 시대의 개막을 알렸다.
◇유훈통치→철권통치, 핵·남한 공격 정권 확립의 기반으로=1994년 7월8일 김일성이 심근경색으로 사망한 뒤 김정일은 애도 기간을 10일에서 100일로 늘리고 김일성 시신 영구보존처리 하는 등 급속한 김일성 우상화 작업을 진행했다.
또 '3년 상'과 비슷한 개념으로 북한 전역에 3년의 애도기간을 설정하고 최고 자리 승계도 미룬 채 김일성이 사망 이틀 전 공표한 내용을 토대로 한 '유훈 정치'를 펼쳤다.
1997년 7월8일 3년의 애도기간이 끝난 후 김일성 생일을 태양절로 지정하고 김일성이 태어난 1912년을 북한 달력의 기준이 되는 '주체 연호'로 만들었다. 기존의 헌법도 ‘김일성 헌법’으로 이름을 바꿨다.
김정일이 이렇게 김일성에 집착한 이유는 통치 기반이 없어서다. 김일성은 북한 수립의 일등공신이지만 자신은 그 권력을 세습 받은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특히 김일성 같은 카리스마가 없다는 소문이 들리기 시작하면서 아버지의 유훈통치는 철권통치로 바뀌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유례없는 대규모 자연재해와 식량난 등으로 인해 북한은 통제력을 완전히 잃었고 민심은 바닥에 떨어진 지 오래였다.
이런 가운데에서도 김정일은 장악력을 높이기 위해 자신을 신격화하고 군력 강화에 몰두해 한국과의 긴장감 정도를 능수능란하게 조절했다.
그 단적인 예가 2000년 6월 평양에서 고 김대중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열고 6·15 남북 공동선언을 채택했음에도 불구하고 2002년 한일 월드컵이 한창이던 6월 제2차 연평해전을 일으킨 것이다.
2006년 1차 핵실험으로 한반도와 전세계를 극도의 긴장상태로 몰고갔다.
2007년 10월 고 노무현 대통령과 두 번째 정상회담을 갖고 10·4선언을 했지만 몇 년 못가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폭격 같은 무력행위를 자행하기도 했다.
연평도 폭격은 김정은에게 권력을 넘겨주기 위한 능력 검증이라는 설도 있다.
철권 김정일도 병마는 빗겨가지 못했다. 2008년 뇌졸중 합병증으로 인한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것.
이런 와중에도 김정은에게 권력을 물려주기 위한 후계작업과 3차례의 중국 방문, 러시아 방문 등 활발한 외부 활동을 벌였다.
김정일은 주로 기차로 움직였는데, 1개의 종합병원과 맞먹는 시설과 의료 인력이 항상 따라다닌 것으로 알려진다. 그만큼 그의 병세가 심중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 같은 상황도 오래 가지 못했다. 결국 그는 아버지와 같은 심근경색으로 2011년 12월17일 오전 8시30분 기차에서 생을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