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쉬했던' 선임병 가혹행위 수천건 적발...군 장병, 병영문화 현주소 자각 계기
가혹행위에 의한 자살도 '순직' 처리
6년만에 軍사법체계 개선 위한 논의 시작
(서울=뉴스1) 배상은 기자 =

28사단 윤승주 일병 사망 사건을 계기로 우리 군에 개혁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고 있다. 부대 전입날부터 날마다 선임병들에 구타와 가혹행위에 시달리던 윤 일병은 지난 4월6일에도 여느 때처럼 선임병들의 무차별한 폭력에 의식을 잃고 쓰러진 뒤 다시는 깨어나지 못했다. 오늘은 윤 일병이 그렇게 스러져간지 꼭 5개월이 되는 날이다. 올해 22살, 아직 꽃도 피우지 못한 한 젊은이의 안타까운 죽음이었다. 하지만 그의 죽음이 헛되지 않은 이유는 수십년간 각종 악습과 폐단으로 병든 군 내부에 쇄신의 씨앗을 뿌렸기 때문일 것이다.
◇ 봇물 터지듯 드러난 병영문화 현주소...장병 자각 계기
윤 일병 사건은 피해자가 곧 가해자가 되는 대물림이 수십년간 반복되면서 쌓인 병영 내 각종 악폐습을 드러내는 계기가 됐다. 육군은 윤 일병 사건 직후 전부대에 긴급 전수조사를 실시해 선임병들의 폭행 및 가혹행위를 3912건 적발한 데 이어 지난달부터 설문조사를 추가로 실시하고 있다.
가혹행위 등 병영 악습을 발본색원하겠다는 취지로 육군 외에 해·공군, 해병대에서도 병영 악습 적발을 위해 소원수리 및 설문조사를 각 부대별로 진행하고 있다. 설문조사는 각 부대 지휘관 주관으로 이뤄지며 혹시 가혹행위 신고자가 불이익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비밀리에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이같은 조치로 그간 드러나지 않았던 병영 내 가혹행위 실태가 봇물 터지듯이 드러나 심지어 강원도 철원 6사단에서는 남경필 경기도지사의 장남 남 모 상병(23)이 가혹행위 가해자로 지난달 13일 형사입건 되기도 했다. 사회 고위층의 자녀까지 가해자가 된 이 사건은 이제 어느 누구도 이미 폭력 등이 일상화된 병영 문제 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경각심을 일깨우는 계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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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관계자는 "윤 일병 사건 이후 복무중인 아들의 부대를 점검해달라는 문의도 빗발치고 있는 데다가 내부 신고도 늘어나고 있다"며 "장병 스스로가 이번 사건을 통해 병영 부조리에 대한 심각성을 자각하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 자살자 순직 인정 확대·평일 면회 허용
지난달 초, 국방부 청사 앞에는 복무중 사망한 장병들의 유가족들이 기자회견을 열고 "우리는 차라리 윤일병이 부럽다"며 국회에서 계류중인 '군인사법개정안'의 본회의 통과를 위한 국방부 차원의 행동을 촉구했다. 군 인사법 개정안은 지난해 12월 김광진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발의한 것으로 의무 복무중 사망한 모든 군인은 순직 처리하고 국립묘지에 안장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국방부에 따르면 지난 한해 군대에서 사망한 총 117명 가운데 79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 '자살'이 전체 사망원인중 압도적인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유족들은 "만약 윤 일병이 가혹행위와 구타를 견디다 못해 스스로 목을 매었거나 방아쇠를 당겨 죽었다면 그 역시 자살로 분류돼 일반 사망으로 처리됐을 것"이라며 "부모님에게는 잔인한 말씀이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차라리 윤 일병이 부럽다"고 말했다.
결국 국방부는 이후 자해(자살) 행위가 직무 수행 및 교육훈련과 관련한 구타, 폭언, 가혹행위 또는 업무 과중 등이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인정되면 순직처리하기로 관련 훈령 개정에 나섰다. 질병에 대한 공무연관성 기준도 완화해 순직 인정폭을 크게 확대했다. 기존 각 군에서 운영하던 재심사기구를 국방부에 설치하고 여기에는 인권전문가와 변호사, 법의학 전문가 등 민간위원을 과반수로 구성하도록 했다. 유족들이 직접 전공사상 재심사를 요청하는 장치도 마련했다.
아울러 이달부터는 일반부대에 복무하는 병사들이 휴일 뿐 아니라 평일에도 애인과 가족을 면회할수 있게 됐다. 다만 최전방 GOP(일반전초) 부대의 경우 잦은 면회가 어려운 복무 여건을 고려해 일단 휴일에만 면회를 허용했다. 윤 일병 사건을 계기로 출범한 민관군 병영문화혁신위원회가 국방부에 '즉시 추진'을 권고한 4개 우선과제 가운데 부모들이 느끼는 불안감과 병사들의 고립감을 해소하기 위해 마련된 조치다.
부대-부모-병사 간 24시간 소통 보장을 위해 중대·대대급 부대에 설치된 밴드, 카페 등을 활성화하는 방안도 추진중이다. 일부 부대에서는 계급별로 공용 휴대전화를 지급하는 방안이 시범적으로 운용된다. 일부 방안은 실효성 논란이 제기되기도 했으나 군 당국은 병영문화 혁신을 위해 다양한 방안을 계속 강구해 나가겠다는 방침이다.
◇ 6년만에 재개된 軍사법체계 개선 논의
그러나 윤 일병 사건이 가져온 가장 큰 성과는 무엇보다 그간 끊임없이 필요성이 제기됐으나 번번히 좌초된 군사법체계 개선을 위한 논의를 군 내부에서 다시 이끌어냈다는데 있다. 당초 단순 상해치사 사건으로 처리됐다가 최초 사건 발생 4개월여만에 잔혹한 전말이 드러나면서 윤 일병 사건은 사단장 등 지휘관의 지휘·통제를 받는 기형적 구조의 군 사법체계에 대한 개혁 요구를 촉발시켰다.
국방부는 지난달 22일 한민구 국방장관을 비롯한 군 수뇌부가 총출동한 가운데 병영문화혁신 고위급 간담회을 열고 군 사법체계 개선에 대한 논의를 재개했다. 한 장관을 필두로 육·해·공군참모총장과 각 군 본부 법무실장, 국방부 법무관리관, 국방부 고등군사법원장, 국방부 검찰단장 등 군 수뇌부가 대거 참석한 간담회에서는 군사법체계의 최대 문제점으로 지적돼온 지휘관 감경권 제도와 심판관 제도 등에 대한 토론이 이뤄진 것으로 전해졌다.
군 사법체계 문제가 군 내부에서 논의되는 것은 지난 2008년 국방부가 노무현 정권 당시 대통령 자문기구인 사법개혁추진위원회(사개추위)의 개선안을 거부한 지 6년만이다.일각에서는 고위급 간담회 명칭이 개최 하루전 돌연 '병영문화 혁신위 고위급 간담회'로 변경된 것 등을 둘러싸고 군이 사법체계 개선에 대한 의지가 없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으나 군 당국은 추가로 간담회를 열고 논의를 계속 이어간다는 입장이다.
한 군 고위관계자는 "첫 간담회에서 한 참석자는 현재 체제안에서 지휘관이 감경권을 행사하는 경우는 0.5%밖에 안된다고 주장하는 등 부정적 의견이 일부 나온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이런 문제제기를 통해 어떤 문제점이 있는지 또 어떤 대안이 있는지 파악해 나가려고 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한 장관도 간담회에서 참석자들에 '잘못된 것이 있으면 반드시 고쳐야한다'며 강한 의지를 수차례 반복해 표명했다"며 "이번에야말로 투명한 군을 만들겠다는 의지는 매우 확고하다"고 강조했다. 다만 일반 장교들이 재판의 심판관으로 참여하는 심판관 제도의 경우 지휘권 약화 우려를 이유로 현행 제도의 틀을 유지하면서 일부 문제점을 보완하는 수준에서 논의가 이뤄지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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