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300]선거, 배신은 정치인의 숙명인가

#1. ‘선거는 민주적인가’. 국민의 손으로 대표자를 뽑는 행위가 민주주의의 전부인 것처럼 여겨지는 우리나라에서 발끈할 이야기지만 버나드 마넹은 동명의 저서에서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고 대답했다.
선거는 투표와 출마에 대한 기회의 평등은 보장하지만 실제 선거에 필요한 사회적 자원, 즉 돈이나 인적 네트워크, 사회적 인지도 등은 불평등하므로 늘 국민보다 이 같은 자원이 풍부한 소수에게 유리한 과두적 제도라는 것이다.
국민들은 주권을 행사한다고 믿지만 늘 정치는 '정치꾼'들에 농락당하는 '배신의 정치'가 바로 선거 때문이라는 기막힌 사실이다.
마넹은 선거의 비민주적인 속성을 보완해줄 장치를 '숙의 민주주의'로 봤다. 정책결정 과정에서 공적 토론을 중시하고 민주적 절차에 따른 의사 결정 존중이 뒤따라야만 선거의 민주성이 담보된다는 지적이다.
하지만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여당 원내대표와 의회민주주의의 결과물로 탄생한 법안이 내팽겨쳐지는 최근 우리 정치 현실을 보면 마넹의 '이런 고민'은 파고들 틈이 없어 보인다. 선거가 비민주성을 넘어 '만악(萬惡)의 근원'이 아닐까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다. 이런 결정의 기저에 내년 총선 공천권을 둘러싼 권력투쟁, 이 과정에서 살아남기 위한 여당 국회의원들의 '생존 본능'이 자리잡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국민의 대의를 실현하기 위해 선거를 통해 국회의원을 선출하는데 선거가 '본'이 되고 국민이 '말'이 되는 본말전도가 일어난 것이다. 이는 국민들에 대한 '배신의 정치'에 다름 아니다.
#2. 박근혜 대통령이 대통령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던 원동력의 상당 부분도 선거 덕분이다. 선친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향수, 드라미틱한 인생 역정, 타고난 품위와 카리스마 등으로 대통령이 되기 이전에 이미 '선거의 여왕' 자리에 올랐다. 그는 선거판 전면 등장할 때마다 예상보다 훨씬 많은 의석을 얻어냈다. 새누리당 후보들의 상당수는 박 대통령의 지원 유세에 목을 맸고 이들 중 적지 않은 수가 박 대통령에게 정치 생명을 빚졌다 생각하기도 한다.
선거에서 살아남는 게 목적인 정치인들에게는 무엇보다 '선거의 여왕'이 필요했을 것이다. 박 대통령과 정치적 노선을 달리하는 이들도 그를 떨쳐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문제는 '선거에서의 승리'가 성공적인 국정 운영을 담보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선거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대통령이 사리에 맞지 않는 요구를 할 때 현실과 대의 가운데서 고민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임기가 시작된 이상 시간은 대통령의 편이 아니다. 임기가 끝나갈수록 권력의 힘은 약해지기 마련이다. 의원들이 자신의 생존 또는 대의를 위해 대통령과 다른 길을 가게 될 가능성도 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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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들의 비판 수위도 갈수록 높아질 수 밖에 없다. 박 대통령을 치켜세우는데 열을 올렸던 한 보수 언론조차 최근 '박 대통령에게서 공화국 대통령에 대한 기대는 접으라'하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박 대통령 입장에서는 이건 또하니의 '배신의 정치'일 것이다.
박 대통령 스스로 이 같은 상황을 너무 잘 안다. 지난달 25일 국무회의에서 박 대통령의 '배신의 정치에 대한 심판' 발언이 '선거의 여왕'으로서 "나 아직 살아있다"는 경고의 말처럼 들린 것도 이 때문이다.

#3.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로 국회에 돌아온 국회법 개정안을 처리하기 위한 국회 본회의를 앞두고 또다른 '배신의 정치'가 기다리고 있다. 새누리당 국회의원들은 박 대통령이 심판해야 할 배신자를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 한 사람으로 갈음하고자 국회법 개정안 부결과 함께 유승민 원내대표를 원내대표직에서 물러나게 하도록 마음을 굳게 먹었다.
대통령의 힘에 굴복해 자신들의 손으로 뽑은 원내대표를 바로 그 손으로 끌어내리고 압도적 찬성으로 가결한 법안을 표결 불참으로 부정해버리는 것은 국회의원 자신의 양심과 소신을 배신하는 정치로 볼 수 있다. 입법부의 독립적 권한을 부여한 국민들에 대한 '배신'임도 두말할 나위가 없다.
유 원내대표도 이와 동떨어져있지 않다. 국회법 개정안은 그가 야당 원내대표와 직접 협상하고 합의한 내용이다. 새누리당 의원들과 대통령의 의견을 존중해야 한다는 핑계를 대지만 그는 원내대표로서 협상 파트너인 야당에 대한 신의를 지킬 책임이 있다. 직무에 대한, 야당에 대한, 국민에 대한 '배신의 정치'는 그의 정치 행보에 작지 않은 상처로 남을 것이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벌어진 '배신의 정치' 시리즈는 총선이 끝난 후 대미를 장식할 가능성이 크다. 대통령이 아무리 발버둥쳐도 5년 단임제 권력은 시간이 지날수록 미래 권력으로 새어나가기 마련이다. 19대 국회에서 '박근혜 키즈'들이 너무 일찍 박 대통령을 배신했듯 20대 국회에 들어올 '박근혜 키즈'들의 배신은 더욱 빠르게 이뤄질 공산이 크다. 그들의 다음 선거를 보장해줄 박 대통령의 힘은 임기가 끝난 후에는 더 약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지금은 박 대통령에게 고개를 숙이기로 한 새누리당 의원들도 내년 총선이 지나기만을 벼르고 있을지 모른다. 그 때가 되면 박 대통령은 또 어떤 방식으로 '배신의 정치'를 심판해 달라고 호소하게 될까. '배신의 정치', '배신의 계절'이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