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300]남북 서로 '홍범도 정통성' 주장…文 "남북관계와 별개문제" 강조

하늘을 날아다닌다고 불린 독립투사, 권총으로 동전도 맞힌다는 백발백중 전설의 스나이퍼, 봉오동·청산리 전투의 영웅.
이런 홍범도 장군은 76년째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에 묻혀있다. 이 기막힌 상황은 망국과 분단이라는 대한민국이 겪은 근현대사의 최대 비극에 따른 것이다.
문재인 정부가 홍범도 장군의 유해봉환을 적극 추진하겠다고 공식화했고 이에 대한 환영 여론도 높지만 왜 아직까지 홍범도 장군의 묘가 이역만리 카자흐스탄에 있는지는 많은 이들의 의문점이었다.
'홍범도' 이름 석자는 알았지만 정작 그를 잘 알지 못했고, 잊고 지내왔다는 반성을 하는 이들도 있었다.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카자흐스탄에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는 반응도 적잖았다.
'백두산 포수' 출신인 홍범도 장군은 한반도 북부와 만주를 근거로 무장 독립투쟁을 했다. 대한독립군의 총사령관이었다. 1921년 '자유시참변'으로 독립군이 러시아 적군의 공격을 받은 후에는 연해주에 머물며 현지 한인 사회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비극은 1937년 시작됐다. 소련 지도자인 이오시프 스탈린의 한인강제이주 정책에 따라 멀고먼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까지 이주했다. 삶의 터전을 떠나 중앙아시아까지 이동하는 고난의 여정이었다.
말년은 독립군 총사령관의 영웅적 모습과 거리가 멀었다. 움막집에 살며 고려인 극장의 경비를 서다가 서거했다. 그때가 1943년. 조국 광복을 2년 앞둔 시기였다. 망국의 한을 온몸으로 받아낸 말년이었다.
분단은 홍범도 장군의 넋도 카자흐스탄에 머물게 했다. 카자흐스탄은 냉전시대 동안 소련의 땅이었기에 대한민국은 유해봉환을 구상할 수도, 시도할 수도 없었다. 북한도 적극적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소련이 무너질 때까지 약 40년 동안 홍범도 장군의 유해는 고향 평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1991년 카자흐스탄이 독립하고 1992년 우리와 국교를 수립한 이후 기회가 왔을 때는 분단의 현실이 발목을 잡았다. 김영삼 정부 시절인 1995년 우리 정부는 홍범도 장군의 유해봉환을 추진했지만 북측이 평양이 고향인 홍범도 장군에 대한 정통성을 주장하고 나섰다.
김상욱 알마티고려문화원장은 "그 당시 남북의 대사관이 알마티(카자흐스탄 최대도시)에 모두 있었는데, 외교전이 아주 세게 붙었다. 북측이 한국에는 명분이 없다고 했다"며 "남북이 홍범도 장군을 놓고 갈등을 하니 고려인 동포들이 그냥 크질오르다 묘역을 있던 대로 두자고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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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유해봉환 대신 크질오르다 묘역의 성역화 작업을 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홍범도 장군 묘역은 무관심 속에 관리 상태가 매우 안 좋은 것으로 알려졌다. 잡초가 무성하고 기왓장은 깨져있으며 안내문은 빛이 바래서 읽기가 힘든 수준이라고 한다.
그러다 올해들어 홍범도 장군 유해봉환을 다시 추진하게 된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카자흐스탄 국빈방문(오는 21~23일)이 계기가 됐다. 중앙아시아 순방을 앞둔 회의에서 홍범도 장군 유해송환 문제를 직접 꺼낸 문 대통령은 '북측의 반대가 문제'라는 보고에 대해 "남북관계와 홍범도 장군의 유해봉환은 별개의 문제"라고 강조했다. 적극 추진을 주문한 것이다.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가 표명된 만큼, 카자흐스탄 현지에서도 "이번에는 홍범도 장군을 고국에 모실 수 있다"는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카자흐스탄 정부 측도 해당 문제와 관련해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 문 대통령의 국빈방문 준비 때부터 양국 정부는 관련 대화를 나눠왔다.
북측과 협의가 또 다시 필요하다면, 홍범도 장군의 유해봉환을 계기로 남북대화가 촉진되는 기회를 만들 수도 있다. 남북이 공동으로 독립운동의 영웅인 홍범도 장군의 업적을 기리는 기회를 만드는 것 역시 가능하다. 망국과 분단으로 사후 76년 동안이나 고국에 돌아오지 못했던 홍범도 장군의 한을 가장 잘 풀어줄 수 있는 방식이 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