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년 만에 형법 총칙 전면 손질
- 판사 재량 적용 '작량감경' 제한
- "세부조건 반영 못한다" 반대도
57년 만에 전면적으로 손질된 형법 총칙 개정시안이 공개됐다. 우리나라 형법은 1953년 제정된 이래 일부 조항이 개정되기는 했지만 형법의 적용범위나 죄의 성립, 형의 종류 등을 규정한 '총칙'이 바뀐 적은 없었다.
반세기 동안 발전된 형법 이론을 반영해 국민 법의식과의 괴리를 줄여줄 수 있다는 점에서 이번 개정작업은 의미가 남다르다. 하지만 일부 조항에 대해서는 개정의 현실성과 실효성을 둘러싸고 찬반 논쟁이 뜨겁다.
◇작량감경, '무전유죄, 유전무죄' 논란
법무부는 지난 25일 '형법 총칙 개정 공청회'를 열고 지난 3년 동안 고심해 만든 형법 총칙 개정시안의 세부 내용을 발표했다. 이 가운데 가장 논란이 됐던 개정안은 법관의 재량으로 형량을 줄일 수 있도록 한 '작량감경' 규정.
현행 형법 53조는 '범죄의 정상에 참작할 만한 사유가 있는 때는 작량하여 그 형을 감경할 수 있다'고만 규정하고 있다. 이에 따라 구체적인 기준이 없어 부작용을 우려하는 지적이 끊임없이 제기돼 왔다.
부산 여중생 성폭행 살해범인 김길태에 대한 양형은 그 사례다. 김길태는 2001년 여성을 10일간 끌고 다니며 성폭행한 혐의로 1심에서 징역 12년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항소심에서 "성폭행 외에는 신체 위해를 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작량감경돼 징역 8년으로 감형됐고 출소 후 살인을 저질렀다.
특히 경제인이나 정치인 등 저명인사들에게 '국가발전 기여'를 이유로 작량감경하는 사례도 많았다. 법률상 최저형이 5년 이상인 범죄를 저질렀어도 형량을 3년 이하로 줄여 집행유예를 선고할 수 있다.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조세포탈과 배임 혐의로 기소된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역시 법정형에서 절반가량 줄어든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이 때문에 '유전무죄 무전유죄' 논란은 끊이지 않았다.
◇"고무줄 형량 줄인다"
형법총칙 개정시안은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작량감경이라는 용어를 '정상감경'으로 바꿨다. 또한 감경 사유를 △범행의 동기에 참작할 만한 사유가 있는 경우 △피해자가 처벌을 원하지 않는 경우 △노력에 의해 피해자의 피해의 전부 또는 상당 부분이 회복된 경우 △피고인이 자백한 경우 △기타 이에 준하는 범행의 수단, 방법, 결과에 있어 특히 참작할 만한 사유가 있는 경우 등으로 한정했다.
법무부 관계자는 "작량감경 조항이 명확한 기준 없이 판사의 재량에 따라 적용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돼 개정안을 마련했다"며 "판결문을 작성할 때 정상감경 사유를 구체적으로 설시하도록 해 판사의 자의적인 감경을 미연에 방지하는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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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법관은 반대…"세부조건 형량에 반영 못해"
일선 판사들은 피고인 개개인의 책임에 맞춰 적정한 형량을 선고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작량감경을 제한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서울중앙지법의 A판사는 "작량감경 제도가 없어지면 경미한 피해와 피해자의 범죄 유발 등의 세부적인 조건을 형량에 반영할 방법이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작량감경 제도는 과도하게 나타나는 법정형을 조정하고 다소 단순화하게 돼 있는 현재 형법상 구성요건을 피고인의 개별적 책임에 보다 부합하게 형을 정하는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작량감경을 제한하면 형량이 과하게 높아질 수 있다는 문제도 제기된다. 과거 형법을 개정하는 과정에서 법정형을 높일 때 작량감경 규정이 고려됐기 때문이다. 법정형의 하한이 지나치게 높은 특별법을 손질해 공정성을 담보할 수 있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다.
일각에서는 개정안의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개정시안의 감경 사유인 '기타 이에 준하는 범행의 수단, 방법, 결과에 있어 특히 참작할 만한 사유가 있는 경우'는 기준이 모호해 법관의 재량권이 크게 제한되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실제로 서울중앙지법의 B판사는 "감경 사유가 구체화돼 '국가경제 발전에 기여', '반성', '우울증', '음주', '재범 가능성' 등을 이유로 한 작량감경은 줄어들게 될 것"이라면서도 "개정시안이 법관의 판단 여지를 남겨두고 있어 재판 결과가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