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위의 또 다른 '길' 유도블록, 실제 체험해보니…

인도위의 또 다른 '길' 유도블록, 실제 체험해보니…

성세희 기자, 김남이
2012.12.23 08:00

국제기준 미달 눈만오면 '흉기'로 변해…정부는 '예산부족' 탓만

흰색 지팡이가 눈길을 가르며 이리저리 춤췄다. 지난 21일 오후 아침부터 내리던 진눈깨비가 눈으로 바뀌었다. 흰 눈밭 사이로 '탁탁' 소리에 맞춰 지팡이를 쥔 한 남성이 발을 옮겼다. 그는 지팡이로 보도 중간에 설치된 노란색 유도블록을 찾았다.

시각장애 1급 한만옥씨(57)는 노원구 중계사거리 인도에서 지팡이를 따라 몸을 맡긴 채 걸었다. 눈이 쌓인 탓인지 점자블록 표면이 얼음판마냥 미끄러웠다. 유도블록 위를 걷기가 위태롭다. 날이 궂을 땐 바짝 긴장한 채 밖을 나선다. 지팡이에 의지한 지 50년째 '베테랑'도 미끄러운 유도블록을 걷기 어렵다.

◇50년 '베테랑' 지팡이 보행자도 아찔

길을 걷던 한씨 발과 지팡이가 유도블록 위에서 함께 비틀댔다. 유도블록 위에 방금 내린 눈이 녹아 미끄러웠다. 순간 가로수와 이마를 찧을 뻔했다. 한씨 발걸음은 더뎌졌다. 한씨는 다시 지팡이로 유도블록을 따라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지팡이를 짚었는지 알아채지 못할 속도.

그러나 몇 년 사이에 집 주변 유도블록이 사라졌다. 한씨는 "언젠가부터 인도 보도블록을 교체하면서 원래 깔려있던 유도블록이 거의 사라졌다"며 "유도블록이 끊긴 길을 걷다가 도로로 떨어지거나 자전거와 부딪히는 등 아찔한 순간을 경험했다"라고 했다.

한씨와 같은 시각장애 1급인 아내 김경자씨(55·여)는 바깥출입이 부쩍 줄었다. 김씨는 며칠 전 집 앞 시장에서 장을 보려고 나갔다가 자전거와 부딪혔다. 지팡이는 부러졌고 자전거는 '미안하다'는 말만 남기고 사라졌다. 김씨는 바닥과 벽에 의지해 겨우 집으로 돌아왔다.

김씨는 "그나마 있던 유도블록이 사라지고 나서 바깥을 나가는 게 두렵다"며 "정부 지원 활동보조인이 보행을 돕지만 보조인을 쓸 수 있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부실한 유도블록 믿을 수 없어…행인도 미끄러져

점자유도블록이 제 역할을 못하고 있다. 시각장애인과 동행해보니 미끄러운 유도블록 때문에 표면을 걷기 불편했다. 그나마 있던 유도블록을 없애 시각장애인이 문 밖을 나가기 어렵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유도블록은 길을 가늠할 수 없는 시각장애인을 안내하는 길잡이다. 하지만 길잡이를 불신하는 시각장애인은 차선책을 택했다. 시각장애인 강모씨(33·여)는 유도블록을 의지하지 않는다. 지팡이 대신 네 살 수컷 시각장애인 안내견 구름이와 함께 다닌다. 구름이와 함께 지낸 후론 지팡이 없이 걷는다.

구름이가 없을 때 점자블록은 강씨를 여러 번 위험한 길로 인도했다. 미끄러운 점자블록 위를 걷다가 넘어져서 다친 적도 여러 번 있었다. 강씨와 함께 다니는 구름이도 미끄러운지 일부러 유도블록을 밟지 않는다.

강씨는 "점자블록은 원래 매끈매끈해 눈이나 비가 오면 더 미끄럽다"며 "점자블록 위에 물청소라도 한 번 하면 표면이 미끄러워 헛딛었다가 크게 다쳤다"고 했다.

시각장애인이 아니라도 눈이나 비가 내린 뒤 유도블록에 미끄러져 다치기도 한다. 김모씨(26)는 자전거를 타고 점자블록 위를 지나다 봉변을 당했다. 김씨는 지난 4월 새 자전거를 타고 한강변을 따라 달리던 도중 비가 내렸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고 자전거가 인도로 올라선 순간 유도블록과 타이어가 닿으면서 미끄러졌다.

김씨는 "자전거가 쓰러지면서 쓰러진 뒤에도 쭉 미끄러지면서 오른쪽 팔과 다리에 찰과상을 입었다"며 "속도를 낸 상태에서 미끄러져 넘어 졌다면 더 크게 다쳤을 것"이라고 말했다.

◇국제 기준보다 크게 낮은 유도블록 저항기준…예산은 부족

유도블록은 인도 위에 난 또 다른 길이다. 유도블록 위로 솟은 요철이 시각을 상실해 촉각으로만 걷는 시각장애인에게 길을 안내한다. 유도블록이 띤 노란색은 시력이 남아있는 시각장애인에게 길과 도로를 구분하도록 돕는다.

2010년 전까지 서울시 유도블록 미끄럼 저항기준이 20BPN(미끄럼 저항값)만 넘으면 유도블록으로 쓸 수 있었다. 숫자가 낮을수록 미끄럽다는 의미다. 국외는 우리나라보다 기준이 엄격한 편이다. 호주와 뉴질랜드는 유도블록이 25BPN 미만이면 매우 위험하다고 경고했다. 영국도 25BPN 미만은 위험하다고 규정했다.

이승철 한국시각장애인편의증진센터 연구원은 "플라스틱 등 합성소재 유도블록은 미끄러우므로 실외에서 절대 쓰면 안 되고 실내에서도 부득이할 때만 써야 한다"며 "그나마 몇 년 전 미관을 이유로 유도블록을 다 걷어내 시각장애인이 다닐 수 없다"고 지적했다.

서울시는 지난해 2월1일 '서울형 보도포장 미끄럼 기준'을 정했다. 앞으로 설치될 유도블록 미끄럼 기준을 최소 40BPN으로 올렸다. 새로운 유도블록을 설치하려니 예산이 발목을 잡는다. 유도블록 예산은 올해 처음 약 4억원이 배정됐다.

서울시 관계자는 "이전에 설치된 유도블록 미끄럼 기준이 낮아 겨울만 되면 민원이 자주 들어온다"며 "유도블록의 표면이 미끄러운데다가 파손된 부분을 복구하거나 길 중간에 단절된 블록을 새로 설치해야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서울시가 올해 부분적으로 유도블록을 교체했지만 미미한 수준"이라며 "보도블록이나 유도블록 교체한다고 신청하면 예산낭비라고 질타받기 때문에 함부로 예산을 올리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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