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이 왜 났는지 정확한 발화 과정이 밝혀지지 않더라도 인과관계가 인정된다면 화재에 대한 업무상 과실 책임을 피할 수는 없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대법원 2부(주심 이흥구 대법관)는 업무상 실화죄 등의 혐의로 기소된 건설업체 대표 A씨와 병원 시설과장 B씨에게 무죄 판단을 내린 원심을 깨고 사건을 다시 판단하기 위해 원심 법원으로 돌려보냈다고 20일 밝혔다.
A씨는 2022년 3월 B씨가 시설관리를 담당하던 충북 청주의 한 병원 주차장 수도배관에 동결방지용 열선을 설치하는 공사를 맡았다. A씨는 전기공사업 등록이나 관련 자격이 없는 상태였다. A씨는 안전확인표시가 있는 완제품을 사용하지 않고 정온전선과 온도센서, 전원 공급용 전선 등을 따로 구입해 수도동결방지 장치를 직접 제작했다. 정온전선의 끝부분은 비닐절연테이프로 마감했다.
공사 이후 이상 현상이 발생했다. 열선이 연결된 콘센트의 차단기가 내려갔지만 A씨는 이 같은 사실을 B씨에게 알리지 않았다. 이후 B씨는 별다른 안전점검 없이 차단기를 다시 올리고 열선을 재작동시켰다. 이후 약 5분 만에 병원 주차장 천장에서 불이 났다.
불은 병원 신관과 구관 일부, 인접한 모텔 등 건물 3채로 번졌고 피해 규모는 약 20억원에 달했다. 화재감식에서는 A씨가 설치한 정온전선 말단부에서 합선에 따른 단락 흔적이 발견됐다. 감식 결과 다른 전기적·기계적 요인 등 별도의 발화 원인으로 볼 만한 사정은 확인되지 않았다.
검찰은 A씨가 무등록 상태에서 안전성이 확인되지 않은 열선을 제작·설치하고 전기적 이상을 제대로 알리지 않은 과실이 있다고 봤다. B씨 역시 등록된 전기공사업자인지 확인하지 않고 A씨에게 공사를 맡긴 점, 공사를 제대로 지휘·감독하지 않은 점, 콘센트 이상이 발생했는데도 안전점검 없이 열선을 재작동시킨 점 등 과실이 있다고 판단했다.
1심은 두 사람의 업무상 실화 혐의를 모두 유죄로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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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2심 판단은 달랐다. 2심은 A씨가 안전확인표시가 있는 완제품을 사용했더라면 합선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봤다. 또 A씨의 과실로 화재가 발생했다고 보기 어렵다면서 1심 판결을 깨고 두 사람에게 모두 무죄를 선고했다.
대법원은 2심 판단을 다시 뒤집었다. 업무상 실화죄에서 업무상 과실과 화재 발생 사이의 인과관계를 인정하기 위해 화재의 구체적인 발화 과정이 직접증거에 의해 명확하게 밝혀져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이유에서다. 적법하게 채택된 증거와 여러 간접사실을 종합해 업무상 과실과 화재 사이의 인과관계를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이 대법원 기존 판례다.
대법원은 화재가 B씨의 관리 범위 안에서 B씨의 지시에 따라 A씨가 설치한 전기장치에서 발생한 점을 고려했다. 대법원은 A씨가 전기공사업 등록 없이 안전성이 확인되지 않은 방식으로 열선을 직접 제작·설치한 점, 열선 콘센트에서 이상이 발생했던 점, 이후 별다른 안전점검 없이 다시 작동시킨 뒤 불과 약 5분 만에 화재가 발생한 점 등을 종합하면 두 사람의 업무상 과실이 경합해 화재가 발생했다고 볼 여지가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화재의 정확한 발화 메커니즘이 밝혀지지 않았다는 사정만으로 두 사람의 과실과 화재 사이의 인과관계를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